소피아야, 저녁밥 먹자!

by 또다시

아버지 생신을 맞아 고향에 갔다. 팔십 대 중반 부모님은 어버이날 뵀을 때보다 심신이 더 약해져 계셨다. 다른 형제들보다 하루 일찍 간 나에게 엄마는 집 청소를 부탁하셨다. 특히 방 한 칸은 창고처럼 잡동사니가 쌓여있어서 정리가 어려우니, 이번 기회에 쓸모없는 것은 다 버리고 싶다고 하셨다.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준비하고 엄마와 난 정리를 했다. 아버지께서 남겨놓으신 많은 업무일지와 문서, 각종 잡지와 광고지, 약 처방전 등을 버렸다. 이밖에 쓰지 않은 여러 물건도 버렸다. 대용량 쓰레기봉투가 순식간에 가득 차 새로운 봉투를 내놓았다. 방에 마지막으로 남은 물건은 몇 가지 가전제품과 책상, 가족 앨범과 형제자매의 졸업앨범이었다.


난 숨통이 생긴 방바닥에 엎드려 앨범을 펼쳤다. 젊은 부모님 모습을 보았고, 지금은 중년이 넘은 우리 형제들의 어릴 때 모습도 보았다. 인생의 덧없음을 느끼며 앨범을 한 장씩 넘겼다. 오래된 흑백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멈췄다. 예전에도 앨범을 넘길 때마다 눈에 띈 사진이었지만, 그때마다 건성으로 지나쳤었다. 우리 집 옥상에서 나, 작은오빠, 언니와 강아지, 그리고 셋방 연숙 언니와 훈정이 오빠가 함께 모여 찍은 사진이었다. 사람들 뒤론 한옥 지붕이 뵈고 남자들은 까까머리, 언니들은 단발머리를 했다. 가장 어린 나는 황구 쎄리를 안고 있었다.



우리 집은 한옥이었다. 대문을 열면 바로 오른편에 변소가 있었다. 대문에서 곧장 열다섯 걸음 정도 걸으면 세를 내준 작은방이 있었다. 우리 식구가 살던 방과 세를 내준 작은방은 큰 마루로 연결되어 있었다. 정훈(가명)이 오빠는 누나인 숙정(가명) 언니와 우리 집 작은방에서 사글세로 살던 고등학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인 나보다 8살 많은 작은오빠와 정훈이 오빠는 친구 사이였다.



방금은 낮이었지만 급히 저녁이 된 어스름한 여름날이었다. 정훈이 오빠가 나를 불렀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정훈이 오빠 방에 들어가 있었다. 정훈이 오빠는 검은 피부에 까까머리를 했다. 눈썹이 진하고 눈빛이 어두웠다.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정훈이 오빠는 내게 자신의 바지 속에 손을 넣으라고 했다. 난 하라는 대로 했다. 무언가 딱딱한 게 만져졌다. 바로 그때였다.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소피아야, 저녁밥 먹자!” 난 엄마 소리가 들리자마자 곧장 우리 집으로 달렸다. 내 생의 최고의 밥상이 나를 기다린 곳으로!



의식 밑바닥에서 맴돌던 일을 밖으로 가져온 때는 10년 전이다. 지금도 완전하게 고쳐진 건 아니지만 옛날의 나는 매사 부정적이고 자존감이 낮았다. ‘나’는 누구인지 어떻게 현재의 ‘나’가 만들어졌는지 의문을 가지고 살았다. 심리학에 관심을 가졌고 공부할 기회가 생겼다. 공부의 첫 번째 작업은 어린 시절을 기억해 내는 일이었다.



생전 처음 그때 일을 구체적으로 표현했다. 잘 정돈된 부모님 집 방처럼 내 마음에도 숨통이 트였나 보다.(202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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