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둥지 채우기

by 또다시

여느 오후처럼 산책하러 집을 나섰다. 피부에 닿는 바람이 어제와 달랐다. 가슴이 아렸다. 내 영혼이 메마른 가을바람 같았다. 맡아서 키운 새들이 성장해서 저들 둥지로 떠났다. 직장에선 은퇴하는 선배들이 하나둘씩 늘고 있다. 곧 내 차례가 될 것이다. 몇십 년 동안 바쁘게 살았다. 먹고 사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어느 날 집을 나서니 가을이 되었고, 내 인생에도 가을이 왔다.


중학교 1학년 가을이었다. 항도여자중학교 백일장 대회가 열렸다. “너 시 잘 썼더라.” 국어 선생님께서 웃으며 말씀하셨다. 며칠 후, 난 백일장 장원이 되었다. 그 후로도 서너 번 글쓰기로 상을 받았지만, 내 글쓰기 활동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대학입시가 중요했다. 대학생이 돼서도 급한 불 끄기에 바빴다. 나와 ‘글쓰기’는 오랫동안 거리가 멀어졌다.


이 년 전 봄날, 출근길에 꽃나무를 봤다. 샛노란 어린잎의 사랑스러움이 새삼스러웠다. 전엔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다. 다음 날부턴 꽃과 나무, 새, 하늘을 예사롭게 보지 않았다. 자연의 생명력과 아름다움에 감탄했다. 벅찬 느낌을 글로 잡아두고 싶었다. 펜을 들었다. 난감했다. 마음은 활활 타는데, 타는 마음을 글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마음은 닫혀있고 생각은 막혀 있었다. 아무것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내 머릿속은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생각은 머릿속을 잠시도 떠나지 않는다.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르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수백 킬로미터 길을 낸다. 과거 일 한 가지가 미래 몇 세대까지 연결된 대서사시를 쓸 때도 있었다. 머리 아플 정도로 쓸데없는 생각을 많이 하지만, 가끔은 괜찮은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오십 년을 살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 딸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친구와 만나면 얘기하고 주제, 자연의 아름다움, 내 인생 이야기 등.


심리학에 ‘미해결과제’라는 용어가 있다. 어린 시절에 주요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도 원활하게 살지 못한다는 말이다. 중학교 백일장 장원 이후, 나는 ‘글쓰기’를 의식(意識) 속에 담아 두었다. 버킷리스트 맨 윗줄엔 언제나 ‘글쓰기’가 있었다. 여린 새순에서 꼴을 갖춘 작은 나무로 성장했던 봄, 불볕더위와 세찬 비가 오히려 득이 되었던 여름이 지났다. 가을이 되었다. 계절도 내 인생에도 가을이 왔다. 본능은 가을에 할 일을 잘도 알아차린다. ‘미해결과제’를 해결할 때가 되었다. 메말라 버린 감성에 물을 주어야겠다. 내 빈 둥지를 보드라운 글로 채워나갈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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