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중학교 하교 시간 교문엔 아이들이 팝콘처럼 쏟아졌다. 톡톡 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웃는 표정, 그 젊음에 내 얼굴에도 미소가 지어졌다. 아이들은 하나둘 모여 제 길을 갔다. 나도 아이들 뒤를 따랐다. 10년 전 장성중 학생이었던 우리 아들 빅터가 생각났다. 빅터도 이 길을 걸어 다녔을 것이다. 가슴이 아렸다. 자신을 쉽게 표현하지 않던 빅터는 엄마가 하라는 대로 했다. 난 아들을 입시 지옥에 내던지고 싶지 않았다. 빅터는 천주교 대안학교 ‘양업고등학교’ 학생이 되었다.
로니는 빅터와 세 살 터울인 우리 딸이다. 빅터가 양업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할 때 로니는 오마중학교를 다녔다. 우리 부부와 로니, 이렇게 셋이서 한집에서 살았고, 빅터는 주말과 방학 때 집에 와서 함께 살았다. 난 평일엔 직장, 퇴근 후엔 신앙교육원을 다녔고, 주말엔 주일학교 교사로 성당에서 살았다. 남편은 직장 일과 자신의 취미 생활에 여념이 없었다. 빅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이번엔 로니가 양업고등학교 학생이 되어 기숙사에서 살았다. 빅터는 대학생으로 우리 부부와 한집에서 살게 됐다. 로니는 주말과 방학 때만 집에 왔다.
로니와 빅터 사이에 말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로니가 어느 주말 집에 왔을 때의 일이다. 난 문득 아들과 딸이 서로 말을 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로니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오빠랑 말 안 했어?”
“내가 중학생이고 오빠는 기숙사에 살 때부터 말을 하지 않았어.”
가슴이 철렁했다. 사이좋았던 오누이가 멀어진 줄도 몰랐다. 이 지경이 되도록 부모는 눈치채지 못했다. 아이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부모에게 하지 않았다. 나와 남편은 일로만 바쁘게 살았고 가족 간 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
2020년, 우리 가족은 드디어 한 집에 모였다. 로니가 양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집 근처 재수 학원을 다니게 된 것이다. 빅터는 집에서 통학할 수 있는 홍익대학교 학생, 나와 남편은 여전히 직장에 다녔지만, 코로나19로 재택 수업과 재택근무로 우리 가족은 한 집에서 시간을 많이 보냈다. 하느님께서 지난 6년간의 한(恨)을 풀 기회를 주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을 풀지 못했다. 온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 여행을 했지만, 빅터와 로니 사이의 서먹함은 해소되지 않았다. 빅터와 로니는 서로를 쳐다보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어색하게 여겼다. 이젠 성인이 된 아이들에게 부모가 개입해 이래라저래라 화해를 유도할 수도 없었다. 코로나19가 주었던 좋은 기회를 놓치고 우리 가정은 또다시 해체되었다. 빅터는 독립해서 서울로 이사 갔다. 로니는 지방에 있는 대학교에 입학해서 기숙사로 들어갔다. 우리 집엔 나와 남편만 남았다.
아이들이 어렸던 이십여 년 전, 가족 여행 중 ‘양업고등학교’ 표지판을 우연히 봤다. 예사롭지 않은 학교 이름에 바로 검색했다. 한국 천주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영성을 기반으로, 특별한 교육을 하는 고등학교였다. 난 아무 의심 하지 않고 우리 빅터가 갈 학교는 ‘바로 이곳’이라 정했다. 그때부터 십 년 가까이 한 가지 소망을 위한 내 기도는 이어졌고, 기도는 이뤄졌다. 그런데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
‘당시엔 최선이라 굳게 믿고 드렸던 나의 기도가 실은 최선이 아닐 수도 있었겠다.’
‘하느님이 보시기엔 ‘그건 아닌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는데, 인간의 어거지로 하는 수 없이 들어주시는 기도가 얼마나 많을까?’
‘기도만 했을 뿐, 기도 후 사후처리는 미흡한 어리석은 인간이었네.’
인생에서 당시엔 절박한 일이라 믿고 내가 선택한 일이 꼭 이뤄지기를 바라며 간절한 기도를 했던 일이, 지나고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일이 있다.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인생을 돌아보니, 내가 했던 몇 가지 선택이 인생 전체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은 누구를 만나고 어떤 선택을 하냐에 따라 갈림이 결정된다.
내가 살고 싶은 집은, 우리 네 식구 한 곳에서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는 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