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큐브릭 Nov 24. 2018

Urth Caffe, and US

파사데나에서 만난 혜리

아이폰 5


어제는 아침 6시쯤 잠이 들었다. 기말고사 기간에도 절대 밤을 새우지 않는 나에게 일출을 보며 잠이 드는 일은 UFO가 우리 집 앞마당에 주차를 한 뒤 외계인이 잠시 화장실을 쓸 수 있겠냐며 우리 집 문을 노크할 만큼이나 희귀하고 드문 일이었다. 전날 밤 10시쯤 마신 스타벅스의 3샷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어쩐지, 턱수염을 멋지게 기른 패트릭(Patrick)이 커피를 건네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을 때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Good luck bro." 

"굿럭은 무슨..." 


그의 오른 팔뚝에는 흑마술사 들이나 사용할 법한 별 모양의 타투가 있었는데, 분명 카페인의 힘을 4배 정도 강하게 하는 주문을 외워놓은 게 확실하다. 


오후 두시쯤 됐을 때 책상 위의 아이폰이 시끄럽게 짖었다. 얼마나 크게 짖어댔는지 나는 심한 욕설과 함께 이불을 걷어차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때 나의 킥을 봤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무회전 킥을 잘 차는 유벤투스의 호날두도 부러워했을 것이다. 


"네 누나."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희경 누나의 전화라서 화를 가라앉히고 친절하게 받았다. 


"응 나야, 목소리가 왜 그래? 혹시 내가 깨웠니?" 

"아 아니에요 누나. 지금 막 일어났어요." 

"아 괜히 미안하네. 나중에 다시 전화할게!"


나는 한층 더 밝은 목소리 톤을 만들어냈다. 혹시라도 누나가 오해할 수 있으니. 

 

"아니에요 진짜 이제 일어났어요. 무슨 일이세요?"


누나의 친한 동생이 미국에 방문하는데, 하루만 시간을 보내달라는 거였다. 운전을 지독히도 싫어하고 낯선 사람과의 만남을 꺼리는 내가 그 제안을 수락한 것은 누나의 지인이 예쁠까 하는 괜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새로운 이성과의 만남은 늘 설레니까. 기쁜 마음을 '숨기며' 희경 누나의 부탁을 수락하고 연락처를 받았다. 그녀의 이름은 김혜리였다. 유심칩을 따로 사지 않았는지 번호는 없고 와이파이를 사냥해 카톡만 가능한 상태였다. 아쉽게도 카톡의 프로필 사진은 없었다. 그녀의 주소를 받은 뒤 구글맵을 열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거리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차의 시동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창문이 반쯤 내려간 조수석 쪽으로 혜리가 다가오며 인사를 건넸다.


혜리는 아담한 체구에 눈이 살짝 쳐진 강아지상의 귀여운 여자아이였다. 미국엔 여행 목적이 아니라 중요한 시험이 있어서 방문했는데 시험을 보고 시간이 남아서 지인이 있는 파사데나에 방문했다고 말했다. 만나기 전에 그녀와 어색할까 걱정했는데, 막상 만나니 혜리는 붙임성이 좋아서 금방 친해졌다. 전시회 보는 것을 좋아해서 미리 자기가 가고 싶은 박물관을 정해놓은 상태였다. 약 2년 살면서 한 번도 가볼 생각이 없었던 박물관을 혜리 덕분에 가게 됐다. 고흐의 그림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었으니 나름 감사하다 생각했다. 


박물관 투어를 마치고 이른 저녁을 먹기 위해 나름 유명하다고 하는 Urth Caffe(어스 카페)로 차 머리를 돌렸다. 여름이라 그런지 해가 길어 오후 6시경에도 대낮 같았다. 


"배고파?" 

"많이 걸어서 그런지 배가 많이 고프네요. 점심도 많이 먹었는데." 

"혜리는 영어를 엄청 잘한다." 

"저 어릴 때부터 영국에 살았어요. 가족들이랑 같이." 

"진짜? 나도 영국 진짜 가보고 싶은데." 

"영국 진짜 좋아요." 


혜리는 뭐가 좋은지 항상 웃으며 대화를 한다. 한국인 두 명이 미국의 도로에서 운전하며 영국 이야기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어스 카페는 이른 시간이지만 사람들이 꽤 많았다. 나름 파사데나의 명물이라 불리는 식당이자 카페라 그런지 조금만 늦었어도 한참을 기다릴뻔했다. 샐러드와 라자냐를 각자 시켜서 나눠먹기로 했다. 오늘 고맙다며 계산은 혜리가 했다. 우리 둘은 많이 친해졌다. 어느덧 각자의 지난 연애 이야기를 하며 마음의 거리가 점점 가까워지는 게 느껴졌다. 연락처를 주고받았고 한국에 가서도 꼭 연락하며 지내자고 다짐하며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레모네이드의 잔을 '짠'하며 부딪혔다. 그 순간 혜리랑 좀 더 머물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기대와 다르게 혜리는 다음날 다른 지역으로 이동했다. 혜리가 떠나는 날 조심히 가라고 카톡을 보냈다. 와이파이를 찾지 못했는지 답장은 오지 않았다. 


집 근처 스타벅스에 가서 패트릭이 건네는 흑마법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생각했다. 역시 어스 카페 같은 핫플레이스보다는 집 앞 스타벅스 커피가 더 취향저격이다. 


'이제 파사데나에서 혜리를 만날 일은 없겠지?'


한국에서 생활한 지 2년째, 현재 혜리와는 연락이 되지 않는다.


   


 

작가의 이전글 벚꽃 오프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