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말을 잃는다는 것

육아에세이 - 키우며 자라나기

by 모지란


네가 오던 날, 뭉근하게 배가 아파오는 느낌에 눈을 떴다. 지난 9개월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인 것 같으면서도 잘 구분이 되지 않았다. 방과 방 사이를 휘휘 걷다가 쇼파에 누워 잠깐 졸면서 무슨 모험 하는 꿈을 꿨다. 이모들이 와서 대강 점심을 챙겨먹으려고 했는데 식욕이 전혀 없었다. 배가 고픈 느낌 대신 슬슬 진통이 오는 것도 같았다. 할머니에게 전화하여 준비해야겠다고 말했다.


오후 한 시가되어 셋째 이모가 과외수업을 시작했다. 나는 혼자 있기가 겁나서 이모와 과외학생, 그리고 강아지와 함께 있었다. 진통이 점점 세지고 간격도 빨라졌다. 멀리 있는 아빠에게는 걱정할까봐 전화하지 않았다. 혹시 가짜 진통이어서 집에 돌아올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병원에 가자마자 입원하게 될 줄도 모르고 말이다.


곧 나는 타임머신을 탔다. 어느 틈에 보니 네가 옆에 누워있었다. 너무 고마워서, 이상하게 목이 메이고, 그간 몇 번을 써보면서 연습했던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사랑해, 예쁘다, 고마워, 엄마야 같은 몇 글자 안되는 말도 이 사이를 비집고 나오지 못했다. 너는 엄마를 만나러오느라 고생을 많이 해서 얼굴에 멍이 있었다. 제일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할 것 같았는데... 너는 신생아실로 가버리고 아빠가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빨간 네 얼굴과 달리 아빠의 얼굴은 새하얳다. 많이 놀랐는지 아빠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든 손짓, 몸짓을 동원해서 상대에게 전해야 직성이 풀리는 나다. 그런 내가 침묵 속에 너를 만났다. 스스로 말솜씨가 꽤나 좋다고 생각 해왔지만 그 순간만큼은 마치 문법을 죄다 잊은 것 같았다. 네가 앙앙 울어대는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캄캄했던 눈 앞이 밝아져 오고, 두꺼운 호스가 연결된 손목을 간신히 들어 너를 맞이 한 그 때. 한 참 뒤에, 그 때 아마 하나도 예쁘게 생기지 않은 네가 너무나 신기해서 말 문이 막혔나하고 생각해보았다.


아니었다. 나는 언어 안에 살고 있는 사람, 너는 언어 밖에서 내게 찾아온 천사라서 우리 사이에는 말이 필요 없었던 것 같다. 말 한 마디 없이도 너는 너에게로 쏟아지는, 어쩔 수 없는 나의 감정을 충분히 느꼈으리라. 그 때의 감정은 사랑, 모성애라고 보기에 힘들었다. (내가 스스로를 엄마라고 느끼는데에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건 아마 세상에 내던져진 새로운 존재에 대한 경이로움이었던 듯 하다. 너무 놀랍고 신기해서, 그 아이가 거기 있다는 사실이 나를 압도해버렸던 것이다. 할 말을 잃었다는 표현이 살갗으로 와닿았다.


나는 눈꺼풀을 힘을 내어 들어올리고 네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평생 네 옆에서 너를 바라봐주겠다고, 눈치채지 못할만큼 옅게 스쳐지는 바람 몇 가닥까지도 대신 맞아주고 싶다고 하는 의지가 솟구쳤다. 세상 누구보다도 널 사랑하게 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마음껏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생겼다는 사실이 행복하고도 두려웠다.


그 날 내내 나는 거의 말을 못하고, 그나마 가족들이 다 돌아간 뒤에는 남편 곁에서 몇 시간을 울었다. 너는 신생아실에 있었고 뱃 속은 텅 비어있었다. 아까는 분명 놀라움과 맞딱뜨렸는데 그 모든 것들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너는 어디있는지 외로워졌다. 말에 아주 서툰 아이처럼 변해버렸다. 괜찮냐고 되묻는 남편에게 아무 대답도 해 줄 수 가 없었다. 다시 한 번 할 말을 잃어버린 것이다. 밤을 꼬박 세우고 이런 저런 검사를 마친 네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유리 너머에 있는 네게 손인사를 건네고 말의 세계로 다시 들어온다.


최근에도 종종 할 말을 잃는다. 기어다니는 데 속도가 붙은 너는 우리집 홍길동이다. 네가 강아지 밥을 훔쳐먹고 있을 때, 하나 남은 화초 이파리를 잡아당기고 있을 때, 침대에 매달려 나를 부르는 노래(소리 지르는 게 분명한데 얼추 노래 같이 들린다)를 부를 때 등등 시도 때도 없이 너는 내게서 언어를 빼앗아간다. 물론 말을 가져가고 행복을 주기도 한다. 너를 재우려고 옆에 누운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작은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그리한다. 어떤 대화 없이도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다. 누구보다 마음 깊이 서로를 알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은 주책 맞게 눈물까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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