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지금 살롱
스타벅스는 생애 첫 아메리카노를,
생애 첫 텀블러를,
생애 첫 나 홀로 카페라는 경험을 줬다.
학교 자판기에서 뽑아먹던 인스턴트커피가 커피의 전부였던 그 나이에, 스벅은 생애를 들먹일 정도의 새로운 세계로 가는 거대한 문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때 엄마의 커피타임만 되면 그 곁에 바짝 붙어서 엄마의 마지막 한 모금 끝에 남은 조촐한 커피 몇 방울을 쟁취하곤 했다. 그러다가 등짝을 맞기도 했지만....(그래서인지 커피는 평생 가도 바람직한 먹거리의 대열에 낄 리 만무하고, 태생적으로 악마적이라 유혹에 빠뜨리고 몸과 마음을 병들게 할 거라는 인상을 줬을지도 모른다) 아무튼간에 엄마 옆구리를 지켜가며, 굳이 등짝을 맞는 걸 감수하면서까지 커피는 그토록 맛있었을까? 과연 그 맛있음의 느낌이 ‘커피 다움’일까, ‘달달함’일까. 엄마가 질색팔색을 할 정도로 단 간식들이 마르지 않게 사주시는 아버지 덕분에 나는 달달함에 궁색한 애는 아니었다. 따라서 내가 보다 끌린 건 바로 ‘커피 다움’이었을 거다. 커피 향을 느끼고, 곧바로 입으로 전해지는 쓰고, 고소한 맛의 전이. 내 나이 10살 즈음에 경험해 본 적 없는, 그렇게 최초와 최신이라는 첨단과 감각의 만남 같은 거였다.
그때 당시 미각 경험상 가장 최신의 경험은 ‘맵다 ‘정도였을 거다. 이를테면 물에 씻은 김치를 떼고 나도 엄마 아빠와 먹는, 그 어른의 김치를 먹게 된 최초 말이다. 그래도 물에 씻은 김치의 단계를 거쳤기에 김치 맛의 본질은 익숙했다. 그래서 맛 경험의 최초를 논하자면 ‘커피 다움’의 맛이란 맵다 정도와는 비교도 안되게 명백한 새로움이었다.
내 생애 첫 스타벅스는 short 사이즈의 아메리카노였다. (캐러멜 마키아토였나..?) 그런데 절반도 마시질 못했다. 커피 다움의 미각 메커니즘을 철저하게 선 긋는 꽤 파괴적인 맛이었기 때문이다. 친절하지 않고, 세련된 도시 한 복판에서 슈트 차림으로 바삐 걷는 백인 여자 같은. 모르겠다. 당시에 내가 느낀 이런 페르소나는 부정적이기보다는 열망에 가깝다.
스타벅스의 커피가 선 긋는 건 맛뿐만이 아니었다. 스타벅스의 문턱을 드나드는 순간부터 나도 스벅을 경험하고 그렇지 않은 또래들을 구분하며, 마치 세련된 꿈을 꾸는 공동체처럼, 그곳은 내 스무 살의 디즈니랜드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1999년 스타벅스의 커피는 이상하게도 카페 커피 맛의 기준이 된 것 같지 않다. 이런 차원에서 맥심 믹스 커피가 대한민국 30대 이상의 인구를 모조리 사로잡으며 커피맛의 기준을 만든 건 실로 엄청난 일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본다. 1999년 스벅의 ‘커피 다움’은 내게 ‘꿈’ 꾸는 맛이 아니었을까. 그 맛에 취해 ‘마시는 것’ 그 자체보다, 내가 당시 그곳을 차지했던 시공간의 점유가 주는 의미가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