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융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는 달라진다는 결론을 지어준 전시.
명동 한복판에서 미디어파사드를 본 적 있다. 화려한 미디어파사드보다 더 아름다웠던 건, 찾아온 사람도, 그냥 지나던 사람도 모두 한곳을 바라보며 감탄하거나 조용히 감상하던 모습이었다.
미디어파사드를 처음 접한 건 훨씬 더 오래전이었다. 당시에는 디지털 예술이 익숙하지 않았던 시기라 건물과 빛 또는 디지털미디어의 조화로운 광경이 신기하고 황홀했다. 명동에서 미디어파사드를 다시 만났을 때는 그만큼의 황홀감과 신기함은 느끼지 못할 줄 알았다. 그러나 명동에서 눈앞에 펼쳐진 미디어파사드를 마주한 순간, 다시 황홀감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즈음이 나와 디지털 예술과의 거리가 좁혀진 시작점이었다.
올해 빛의 시어터를 관람하면서부터 디지털 기술과 예술과의 조화를 피부로 느꼈으며, 디지털 기술과 예술작품 협업의 미래에 기대가 생겼다. 이번에 향유한 미구엘 슈발리에 작가의 ‘디지털 뷰티 시즌2’는 인간과 디지털의 만남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시간이었다.
미구엘 슈발리에 작가는 테크놀로지, 예술, 프랑스 디지털 아트의 거장이라고 한다.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예술에 접목한 작품을 선보였으며, 디지털 예술의 선구자로 알려진 미디어아티스트다. 국내에서는 ‘디지털 심연’과 ‘디지털 뷰티 시즌1’을 선보였으며, 뒤를 이어 ‘디지털 뷰티 시즌2’ 전시가 8월에 서울 아라아트센터에서 열렸다. 내년 2월 11일까지 전시하므로 아직 미구엘 슈발리에 작가의 작품세계를 향유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이번 기회에 경험하길 바란다.
‘디지털 뷰티 시즌2’는 그의 최신작으로 세계에서 최초로 공개했으며, 70여점의 작품으로 개인전 중 최대 규모의 전시다. 관객 참여형 전시라 나로 인해 새롭게 탄생하는 예술작품을 즐길 수 있다.
지하부터 5층까지 여러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고, 1층이 가장 마지막 순서로 동선이 헷갈릴 수 있어 입장하기 전 안내를 잘 듣고 관람해야 한다. 나는 안내를 들었는데도 5층에서 굿즈샵으로 이어져서 1층을 관람한 걸로 착각하고 퇴장했다. 이 점 참고하여 나처럼 빠트리는 부분 없이 관람하길 바란다.
먼저 지하1층에서는 ‘그물망 복합체’, ‘그물망 복합체의 벽’, ‘그물망 드로잉’, ‘라이좀’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물망 복합체’에는 VR이 설치되어 있어서 나의 움직임과 멈춤에 따라 그물망은 빠르게 또는 느리게 변했다. 로봇이 네온 펠트펜으로 그린 ‘그물망 드로잉’은 사람이 그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견고하고, 섬세했다.
나름대로 평화로운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그물망이 나와 일행의 등장에 달라지는 걸 보면서 우리의 인간관계를 떠올렸다. 새로운 사람의 등장으로 파장이 일어나기도 하고, 서로 맞춰나가며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관계를 보는 것 같았다. 또는 상대와 나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예기치 못했던 순간을 겪고, 변화하는 모습을 닮아있기도 했다.
‘라이좀’은 서로 얽힌 여러 막대가 천장에 매달려 지하 1층으로 이어져 있었다. UV라이트에 의해 막대들은 알록달록한 형광색으로 보였는데, 색감이 매력적이었다. 여기저기 뻗어있는 막대들 그리고 다양한 색의 막대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모습, 하나하나 보면 개성이 강했지만 멀리서 보면 하나의 형태였다. 그 광경이 마치 다양한 인간이 모여 사는 지구 같았다.
지하 2층에는 ‘세상의 기원’, ‘리퀴드 픽셀’ 작품이 있었다. ‘세상의 기원’은 생물학과 미생물의 세계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작품이라고 한다. 이 작품이 가장 인상 깊었다. 이 전시의 대부분의 작품이 관객의 몸짓, 손짓, 동선에 의해 무언가가 더해지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형태가 되는 등 변화한다. 특히 ‘세상의 기원’ 작품의 변화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나의 작은 움직임에도 반응하여 흐트러지고 다른 모양의 세포가 되는 과정을 보면서 몸에 있는 세포들과 일상의 생물들이 떠올라서 기분이 묘했다.
지하 3층에서는 ‘디지털 무아레’, ‘스트레인지 어트랙터’ ‘어트랙터 댄스’가 전시되어 있었는데, ‘어트랙터 댄스’가 ‘세상의 기원’ 다음으로 좋았다. 로봇 드로잉을 선보인 ‘어트랙터 댄스’는 패트릭 트레셋과 협업한 작품이다. 중앙에는 깃털 펜을 손에 쥐고 그림을 그리고 있는 다섯 개의 로봇이 있었다. 캔버스에 시선을 두면, 한 사람이 직접 그림을 그리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세밀함이 돋보였다.
깃털 펜을 보면, 리듬감이 충만한 칼군무와 인간의 춤선 같은 깃털의 선에 정신이 쏙 빠졌다. 이따금 펜을 캔버스에서 떼어 숨을 고르는 것처럼 보일 때는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과정과 완성된 작품을 번갈아 보면서 로봇의 솜씨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일행은 ‘이게 로봇이 그린 거였어? 사람이 그린 줄 알았어.’라면서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화려한 춤사위로 그림을 그리는 로봇의 퍼포먼스와 로봇이 완성했던 작품들을 함께 관람하면서 결과물뿐만 아니라 과정 또한 예술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벽면에 걸려 있던 완성된 작품보다 중앙에 있었던 작품이 더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지하 4층에는 ‘매직 카페트’, ‘프랙탈 줄기’가 있었다. ‘매직 카페트’는 바닥에 깔린 디지털 카페트로 관람객을 다른 시공간에 와있는 것 같은 마법 같은 순간을 선사했다. 걸을 때마다 다양하게 변하는 카페트 무늬를 보면서 나도 모르게 신이 났다. 나와 일행이 방문했을 때는 다른 관람객이 거의 없어서 우리는 어린이가 된 듯 여기저기 그림을 밟고 다니며 놀았다. ‘매직 카페트’는 동심을 잊고 산 어른에게 동심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 같은 순간을 선물해 줬다.
못 봐서 아쉬웠던 1층에는 ‘기계의 눈’, ‘머신 비전’, ‘패트릭 트레셋의 휴먼 스터디’가 있다고 한다. 5층은 ‘프랙탈 플라워’ 작품을 관람할 수 있는 상설 전시관이 마련되어 있었다. 3D 프린터로 만든 꽃이 중앙에, 동일한 모양의 디지털 꽃이 벽면에 전시되어 있었다. 안쪽으로 걸어가면 벽면을 가득 채운 가상의 꽃들이 생명을 얻은 듯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꽃들은 쑥쑥 자라나기도 하고, 기지개를 켜듯 꽃잎을 활짝 피우기도 했다. 실제 꽃의 탄생과 성장을 눈앞에서 지켜본 느낌이 들었다. 이미 다 핀 꽃이 더 활짝 피기 위해 힘을 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응원하고 있었다. 아마 꽃이 자라는 모습이 사람과 비슷해서 친밀감과 동질감이 들었나 보다.
그물망과 라이좀 작품은 인간관계, 세상의 기원은 내 안에 있는 세포의 삶과 같았다. 각자의 위치에서 맡은 일을 하고, 칼군무로 아름다운 조화를 보여줬던 ‘어트랙터 댄스’는 우리의 사회 또는 가족 등 인간의 한 집단을 보는 듯했다. 여러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 예술작품을 통해 인간의 삶을 보고, 인간의 세계와 디지털 세계의 만남을 관찰자의 시점으로 보았던 시간은 매우 특별했다.
이 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관람객의 의해 예술작품이 변화한다는 점이다. 관람객이 작품에 녹아들기도 하고, 관람객에 의해 비슷한 듯 다른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기도 한다. 관람객의 움직임과 멈춤, 손짓에 의해 모양이나 색, 빛은 번지거나 새롭게 변한다. 어떤 결과물이든 관람객이 주체가 된다는 점이다. 또 흥미로운 점은 대부분 변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기 행동을 컨트롤한다. 어떻게 반응하는지 살피며 행동한다는 거다. 이를 발견하고 경험하면서 아직 남아 있었던 디지털과 인간의 융합에 대한 약간의 편견마저 사라졌다.
디지털 기술은 삶의 질을 높여준 건 사실이다. 동시에 그것이 우리의 정신과 신체의 건강을 악화시킨 것도 사실이며, 우리에게 두려움을 안겨 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우리가 주체가 되어 잘 활용하고, 일상에 녹아들게 한다면 괜찮지 않을까. 대신 주체가 되었다고 해서 독재적이면 오류가 생기기 마련이다. 또한 너무 과하게 활용하거나 악용하면 도리어 우리를 위협하고 해치는 존재가 될 테다. 반응과 변화과정을 계속 살피며 끌어나간다면, 인간의 세계와 디지털의 세계가 융합이 잘 될 거로 생각한다.
어떻게 융합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게 이 전시를 통해 얻은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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