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아무것도 몰라. 쉿!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여름처럼 매우 뜨겁고 강렬했으며, 아득한 장마를 닮은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무대 위에는 여덟 개의 의자와 검은색 구두가 놓여 있었다. 자로 잰 듯 일정한 간격으로 가지런히 놓여있는 의자와 구두들, 붉은 조명으로 뒤덮인 무대, 좁은 틈 사이로 들어온 푸른빛을 보니 괜스레 갑갑함이 느껴졌다. 나는 줄거리를 어느 정도 알고 갔지만, 모르는 사람도 무대 하나만으로 어떤 극이 펼쳐질지 예상하기에 충분해 보였다.
배우가 아직 등장하지 않은, 오로지 소품들만 있는 무대를 보면서 연출 의도가 궁금해졌다. 다양한 소품이 놓여있는 무대를 봤지만, 배우가 신는 구두를 가져다 놓은 무대를 본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 궁금했다. ‘왜 구두를 저기에 가져다 놓았을까?’라는 질문을 속으로 외치며 공연이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공연이 시작되고, 검은색의 의상을 입은 배우들이 등장했다. 배우들은 의자에 앉아 구두를 신었다. 신을 신은 채로 등장하는 게 아닌, 무대에 등장해서 신을 신는 연출이 색달랐다.
지금껏 봐왔던 뮤지컬과 차별화된 연출은 구두뿐만이 아니었다. 뮤지컬은 극의 이미지를 결정하는 건 넘버(노래)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관람할 때마다 가장 많은 관심을 쏟는 부분이 넘버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넘버들의 공통점은 ‘한’이었다. 모든 멜로디와 가사에 ‘한’이 있었다. 밝은 분위기의 곡도 있긴 했지만, 그마저도 한을 품고 있었다. 화려하거나 아름다운 노래가 많은 여느 뮤지컬과는 달랐다.
뮤지컬의 매력 중 하나가 이야기를 관람하면서 웅장한 악기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인데, 이 뮤지컬에서는 악기 소리는 단 한 음도 들을 수 없었다. 대신 배우들의 손뼉소리, 발 구르는 소리, 핑거스냅 소리, 가슴을 두드리는 소리가 악기의 빈자리를 채워줬다. 오케스트라가 없는데도 인간이 내는 소리만으로 극장 안을 가득 채울 수 있고, 그 소리에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무엇보다 스페인 희곡이 원작이라 평소에 보기 어려운 플라멩코와 스페인 음악을 마음껏 보고, 들을 수 있어 기뻤다.
주인공 베르나르다 알바는 다섯 딸을 비롯해서 하녀들까지 통제하고, 억압했다. 극 중 인물들은 장례를 치른 후라 모두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디자인까지 비슷했다. 헤어스타일과 구두까지 비슷했다. 배우들의 의상과 헤어스타일, 신발을 극 내내 통일성 있게 연출함으로써 관객들에게 극 중 인물들이 처한 상황을 각인시켰다.
덕분에 공연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궁금증이 해소됐다. 무대 즉, 집 안으로 들어온 배우들은 이제 억압이 시작됐다는 것을 관객들에게 강하게 알리기 위함이었다. 그 구두가 극 중 인물들을 묶어놓는 것 같았다.
소품을 활용하여 캐릭터를 표현한 점도 좋았다. 마리아 호세파와 아델라는 극 중 인물 중 제일 강하게 자유를 갈망했고, 억압에 맞서 싸우고자 했다. 몸은 방 안에 갇혀있지만, 마음만은 자유로운 마리아 호세파는 공연 내내 흰색 잠옷을 입고 있었고, 구두도 신지 않았다. 한편 억압과 자유 사이에서 갈등하던 아델라는 다른 딸들과 같은 옷, 구두를 착용하고 있었다. 헤어스타일도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상태였다. 아델라가 초록색 드레스를 꺼내어 자기 몸에 대보는 장면은 아델라가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자유를 선택한다고 암시했다.
마침내 아델라가 자유를 택했을 때, 그녀는 흰색 잠옷 차림에 맨발이었다. 머리도 어깨 밑으로 길게 늘어뜨렸다. 소품 하나하나로 캐릭터의 성향과 감정선을 표현한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의자는 얌전히 앉아서 수를 놓고, 조신해야 하는 당시의 여성상을 나타내기도 했다. 무대 상단에서 툭, 떨어지는 의자로 아델라의 자살을 의미한 부분에서는 베르나르다 알바의 억압과 사회에서 억압받는 여성의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아델라의 심정이 느껴졌다. 전 공연에서는 의자 대신 샹들리에를 떨어뜨렸다고 한다. 이번 공연에서 의자로 바꾼 건 Good Choice 이었다.
여성 서사극이라 여배우들이 많이 출연하는데, 여성이 주체가 된 극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듯 남자 캐릭터마저도 여배우가 남장해서 연기했다. 그래서 드레스를 입은 배우들과 다르게 남장하는 배우만 바지를 입고 등장했다. 공연 내내 남성이 한 명도 나오지 않은 뮤지컬은 처음 경험했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가부장적인 사회로 인해 억압받고, 자유를 빼앗기며 무시당하는 여성의 삶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극이다. 그런데 여성인 베르나르다 알바는 권위적, 독재적, 폭력적, 이기적, 비양심적, 위선, 자신보다 약한 사람을 무시하던 당시의 남성과 똑같았다. 보통 극에서 폭력적이고 권위적인 캐릭터는 남성이었는데, 이 극에서는 여성이라서 새로웠다. 여성 서사극만의 색을 제대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색다른 연출로 나에게 신선한 자극을 줬다면, 스토리와 메시지는 불편감과 울림을 줬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안토니오의 장례를 치른 후, 딸들에게 8년 동안 혼숫감이나 만들며 집 밖에 나가지 말라고 통보한다. 바깥바람도 용납할 수 없을 만큼 철저하게 외부와 단절시킨다. 그래서인지 좁은 틈으로 들어오는 한 줄기의 빛이 딸들이 갈망하는 자유처럼 매우 소중해 보였다.
베르나르다 알바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권리까지 빼앗았다. 자기 딸들은 마을 남자들과는 수준이 맞지 않는다며 남자와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그 와중에 앙구스티아스는 젊고 멋진 남자와의 사랑, 억압에서의 탈출을 모두 이루게 생겼으니 나머지 딸들에게는 그런 앙구스티아스가 얄미웠을 거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억압 그리고 앙구스티아스의 결혼 준비로 딸들의 관계는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했다. 작은 삐걱거림은 점점 더 몸집을 키우고, 모양은 날카로워져서 마침내 베르나르다 알바의 가족을 잔인하게 베어버리고 만다.
이 작품은 인간이 베르나르다 알바와 같이 독재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리더를 만나고, 억압당했을 때 일어나는 비극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현실적인 방법을 찾아 극복하려고 했던 앙구스티아스, 처한 상황에 순응하고 체념했던 막달레나, 세상과 사랑을 순수하게 바라보려고 노력한 아멜리아, 반대로 염세적인 시선으로 보는 길을 택한 마르띠리오, 처한 상황에 맞서 싸우고자 했던 아델라까지 사람에 따라 억압과 사랑에 어떻게 반응하고 대응하는지 세밀하게 그렸다.
인상적이었던 점은 다섯 딸들은 오로지 자기 이익만을 위해 행동했는데, 하녀인 폰시아는 달랐다.
폰시아는 긴 세월 동안 베르나르다 알바에게 충성했지만, 무시만 당하였다. 자신을 인간 취급조차 하지 않는 베르나르다 알바를 배신하겠다고 결심하며 의자에 침을 뱉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침 뱉은 의자를 자신의 옷소매로 닦으며 마음을 다잡는다.
베르나르다 알바의 딸들이 폭력을 당할 때도 막아주고, 아델라에게 불륜을 저지르면 안 된다며 진심으로 꾸짖기도 했다. 문제를 누구보다 가장 먼저 알고, 들여다보려 했으며 더 커지기 전에 해결하려고 했던 인물도 폰시아였다. 그러나 내뱉는 말을 들어보면 마냥 바르고 선한 인물도 아니었다. 선과 악이 공존하고 있었다. 폰시아는 극 중에서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만 평화로운 거고, 각자의 방에서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폰시아의 충고에도 베르나르다 알바는 끝까지 ‘쉿’만 외치며 침묵을 강요했다. 집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갈등과 문제를 알면서도 모른 체 했다.
마르띠리오가 언니의 약혼자인 빼빼 사진을 훔쳐서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을 때도 그 일을 묻으려 했다. 그렇게 무섭던 베르나르다 알바는 마르띠리오에게 단호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앙구스티아스에게는 장난이었다고 하니 그냥 잊어버리라고 말했다. 억압하고 통제하던 그녀가 정작 중요한 순간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베르나르다 알바가 놓쳐버린 두 번의 기회는 사건의 발단이 되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아델라는 욕망을 위해 잘못된 선택을 하고, 결국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며, 마르띠리오는 미성숙한 행동으로 가족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여기서 혼란스러웠다. 억압으로 인해 비극이 된 인간의 이야기가 아델라와 마르띠리오를 억압하지 않은 게 비극의 지름길이 되었다는 부분이 이해할 수 없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억압과 억제의 차이였다. 상대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과 자유를 빙자한 그릇된 생각이나 행동을 억제하는 건 다르다는 걸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결국 베르나르다 알바의 가족은 파국을 맞게 되지만, 베르나르다 알바는 자식을 잃었음에도 여전히 ‘쉿’을 외친다. 문을 닫으며 자신과 자식들을 다시 그 집 안에 가두어버렸다.
마지막까지 굳게 닫힌 문을 보며 앞으로 더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예감에 숨이 막혔다. 처음부터 끝까지 부풀어 오르고 있었던 풍선은 끝내 터졌지만, 또 다른 풍선이 생긴 기분이었다. 결국 그 풍선도 터지고 그땐 여기저기 흩어진 풍선의 잔해처럼 베르나르다 알바의 가족도 그렇게 될 것 같았다. 공연 시작부터 느꼈던 불편감은 끝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난 이 평화와 고요를 즐길 거야. 오늘도 무사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 보호 안에서는 모두가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지. - 베르나르다 알바
베르나르다 알바가 한 말을 잘 들어보면, 그녀의 바람이 스며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다. 그녀는 두 번의 결혼을 경험했고, 한 번의 실패를 겪었다. 그리고 남편이 죽기 전까지 잘 사는 듯 보였지만, 사실 남편의 끝없는 욕망으로 첫째 딸과 어린 하녀를 탐하려 했다. 그녀는 가정을 지키고 싶었고, 안 좋은 일을 감당하고 싶지 않았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자기 자신에게 주문을 걸듯 “난 이 평화와 고요를 즐길 거야. 오늘도 무사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내 보호 안에서는 모두가 편안하게 숨 쉴 수 있지.”라고 말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그녀는 자신과 딸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억압했다. 문제가 생겨도 모른 체 했다. 덮어두고 잊어버리면 없던 일이 되고, 더는 안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 거라 여겼다. 그럼, 모든 게 평화로울 거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그건 억지평화였다. 이 억지평화가 자신과 딸들의 마음을 베어버리고, 가정을 파괴한다는 걸 알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이 사실을 모른 채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앞으로 더 고통 받을 네 명의 딸이 안쓰러웠다. 자신이 만들어 낸 억지평화가 자기 발등을 찍을 거라는 걸 모르고 있는 베르나르다 알바가 안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니, 무심결에 알고 있음에도 회피하고 외면하고 있는 걸까.
베르나르다 알바처럼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 않으려면 내가 베르나르다 알바와 닮진 않았는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작품이 보여준 억압이 만든 비극보다 억지평화와 침묵강요로 인해 벌어진 비극을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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