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여전히 겨울나그네이다.
갈수록 가속도가 붙어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도 잘 적응하며 발맞춰 가고 있다. 겉보기엔 그렇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정말 그럴까.
아들아 이제는 뒤돌아보지 말아라, 지금 네 곁에 가족이 있으니
행복은 내가 가진 걸 소중히 여기고 사랑해 주는 것
살아가야만 해 너의 세상 속으로
우린 왜 언제나 뒤늦게 알게 될까, 삶이 숨겨둔 그 행복을
흘러간다 세상은 멈추지 않고 변해간다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간다 모두 끝난다
지나간다 기쁨도, 슬픔도 모두 끝이 난다
우린 매일 이별하며 살아간다, 마음에 남아
(중략)
산다는 게 힘겨웠나, 고단했던 너의 삶이, 마음에 남아
故최인호 작가의 장편소설 ‘겨울 나그네’는 24곡으로 이루어진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를 바탕으로 80년대 젊은이들의 방황과 민우와 다혜의 순수한 사랑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23년, 故최인호 작가의 10주기를 맞아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뮤지컬 ‘겨울나그네’가 관객을 찾아왔다.
97년, 초연했을 때 뮤지컬대상에서 대상 포함 4개의 상을 휩쓸었다. 2005년에 재연한 뒤 오랫동안 소식이 없다가 23년에 세 번째 공연이 열렸다. 80년대 시대극이라 그때의 사회구조와 젊은이들의 성향을 간접 경험할 수 있다. 평소 시대극을 잘 보는 편인데도 처음에는 어색하고 이해하기에 어려웠지만, 세밀하게 그린 인물의 감정선 덕에 이야기 속으로 금세 빠져들었다.
옛 감성이 충만한 이야기와 달리 넘버들은 최신가요로 나와도 될 만큼 트렌디했다. 서정적이지만 현대적인 감성이 돋보였던 곡들은 작곡가 김형석, 작사가 양재선이 참여했다고 한다.
집에 돌아가는 길에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될 정도로 쉽고, 매력적인 곡들이었다. 멜로디도 좋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여운이 사라지지 않는 건 가사였다. 인물의 성향과 감정선, 그들의 삶까지 가사에 잘 녹여냈다. 글머리 부분 박스 안에 적어놓은 글귀는 ‘내 아들아 reprise.2’와 ‘레퀴엠’의 가사이다. 다시 찬찬히 읽어보면 알 수 있듯 극 중 인물들의 삶만이 아닌, 우리의 삶 같기도 하다. 가만히 듣다가 갑자기 울컥해서 참느라 애먹었다. 아직 삶에 대해 모르는 게 많은 내가 듣기에도 이토록 슬픈데, 중년이었다면 아마 감정을 참지 못하고 쏟아냈을 게다. 8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극인 데다 공감할 만한 가사가 많아서 나이 지긋하신 분들이 보기 좋을 것 같다.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인상적이었다. 음향환경이 좋아 소리가 선명하고 웅장하게 들려서 마치 클래식 콘서트홀에 앉아있는 기분이 들었다. 오른쪽 사이드에 시선을 돌리면 지휘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었다. 귀로는 최상의 음질로 연주를 듣고, 눈으로는 지휘자와 뮤지컬 배우들을 번갈아 보니 뮤지컬과 오케스트라를 동시에 관람하는 것 같았다.
배우들의 실력은 감탄이 절로 나올 만큼 대단했다. 연기는 물론이고, 발성, 가창력, 배우들 간의 호흡까지 완벽했다. 특히 앙상블(코러스 배우)의 존재감 있지만 주인공을 뒷받침해 주며 아름다운 조화를 만들어내는 출중한 실력에 감동했다.
특히 의사 가운을 입은 배우들과 검은 옷을 입은 배우들이 교차하어 사라지고 등장하면서 민우에게 손가락질하고, 몰아세우듯이 노래하는 장면에서 소름이 돋았다. 주인공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민우가 타락하는 과정을 주도적으로 묘사하는 광경을 보면서 모든 배우의 실력과 열정이 어우러져야 풍부하고,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는 걸 다시 느낀 순간이었다.
극은 1막과 2막으로 진행됐다. 1막은 수미상관 구조로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이 같았다. 즉 절정이 맨 앞으로 오면서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자극적인 장면으로 집중도를 확 올려줬다.
극은 전체적인 흐름보다는 인물들에게 중점을 둔 듯했다. 이 점으로 인해 완성도 면엔서 아쉬움이 남았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사실 그 선택은 옳았다고 판단했다. 시대극이지만,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관객보다 젊은 관객이 더 많이 볼 것 같은 배우 라인업이었다. 그러니 전체적인 흐름에 중점을 두었다면 젊은 관객은 극에 빠져들 수 없었겠지만, 인물의 감정선에 중점을 둠으로써 주인공을 가엾게 여기며 빠져들게 되고, 극의 흐름을 잘 따라갈 수 있었다고 본다.
이야기는 민우와 다혜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민우는 의과대학에 다니며 대학 생활을 성실히 하는 학생이었다. 다혜에게 첫눈에 반했는데도 선뜻 다가가지 못할 정도로 순수함을 가진 청년이었다. 그 시대의 아들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버지에게 딸처럼 다정히 대했다. 사람들의 손가락질과 험담에, 단번에 타락할 정도로 여린 민우이지만, 중요한 순간에서는 대범함과 강함이 드러나기도 했다.
다혜의 노래를 듣고 마음에 확신이 생긴 민우는 용기 내어 마음을 표현했다. 병상에 누워 계신 아버지가 빚쟁이에게 위협을 당할 때는 용감하게 맞서 싸워 아버지를 구해줬다. 비록 음지의 길을 택했지만, 절벽 끝에 선 상황에서도 삶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고 어머니가 있던 곳을 찾아가 어떻게든 살아가려고 했다. 마약거래를 하는 곳에 있으면서도 제니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패기 있게 말했고, 제니의 끈질긴 유혹에도 넘어가지 않았다.
그는 주변 분위기에 쉽게 말려드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그가 인간에 의해 결국 마약에 손을 대고, 제니의 유혹에 넘어가고, 범죄를 저지르고, 삶을 포기하기까지의 과정을 보면서 매우 안타까웠다.
다혜는 겉보기에는 당시 시대의 여성들과 다를 바 없는 연약하고 순종적인 인물로 보였지만, 민우처럼 강인한 인물이었다. 혼자 희망도 없는 기다림을 견디는 게 매우 고독했을 텐데, 작은 희망을 놓지 않으며 꿋꿋이 버텼다. 민우가 경찰에게 쫓기는 상황이 되었어도 여전히 그를 사랑하고 기다렸다. 다혜는 민우가 기다려달라고 하지 않았는데도 자신의 의지로 기약 없는 기다림을 택했다. 아기를 안고 있는 제니와 대면한 후 민우를 포기하는 쪽을 선택한 것도 그녀의 의지였다. 순종적일 것만 같았던 그녀는 독립적이었으며,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 더구나 본인이 선택한 것에 대해 끝까지 불평불만 하지 않고 책임을 지고, 고통의 과정도 기꺼이 감당하며 인내했다.
이런 두 인물의 반전 매력은 현시대에서는 큰 매력점이 되지 못했지만, 초연했을 당시에는 매우 매력적인 인물로 비쳤을 것 같다.
민우와 다혜는 서로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주변 인물들의 꾀와 이기적인 언행에 말려들어 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나이아가라에 몸을 담았지만, 중심을 잃지 않았던 민우가 결국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 것도 주변 인물 때문이다. 주변의 분위기에 쉽게 말리지 않는 단단하고 강인한 두 인물이 주변 인물들의 언행에 말려든 이유는 극 중에서 가장 선해서라고 생각한다. 인간의 적은 인간이라는 문제, 가장 선한 사람이 억울한 상황을 겪거나 이용당하고, 상처받는 문제를 ‘겨울나그네’는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씁쓸했던 건 그런 사회흐름이 현시대에서도 되풀이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시대가 변했음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속내다. 당시의 문제는 현시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겨울나그네’에서 부각된 문제는 변화한 현시대에서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이는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수박 겉핥기식으로 적응하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극 중에서 겨울나그네는 민우를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다혜, 현태, 제니 등 극 중 모든 인물이 겨울나그네라고 생각한다. 모두 자신이 가진 행복과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하고 방황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희생양은 또 누군가가 될 거라 예상한다.
겨울나그네가 없는 시대가 되려면 고질적인 문제인 선한 사람을 몰아세우는 사회구조를 없애야 한다. 한 사람이 희생될 때마다 다른 사람이 타깃이 되기 때문에 결국 이 세상에서 겨울나그네가 아닌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더는 우리가 그리고 이 세상이 춥고 시리지 않도록 서로를 존중하며 따스하게 보듬어줘야 한다. 진정으로 성장하여 변화한 시대가 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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