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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의 지식, 아름답지만 가녀린

by 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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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과학의 지식, 아름답지만 가녀린

휴대폰 영상통화 서비스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입니다. 횡단보도 앞에서 빨간불이 들어와 차를 세웠습니다. 그때 두 명의 여학생이 횡단보도를 건너갑니다. 평범한 두 소녀인데 눈에 띕니다. 한없이 밝은 함박웃음을 띤 얼굴에 몸짓이 요란합니다. 보는 이도 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아이들입니다. 뭐가 저리 재미있을까? 아빠 마음으로 저도 절로 흐뭇했습니다.


아이들이 제 차 앞을 지나갑니다. 청각장애가 있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생동감 넘치는 몸짓은 전화기 속 상대방에게 전하는 ‘수화’였습니다.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아이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은 저를 울컥하게 만들었습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잠깐이지만 호흡도 울렁였습니다. 아마 신호가 바뀌어서 출발하지 않았더라면 소리 내어 울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핸드폰을 만들어 준 분들에 대한 감사, 연구한 과학자들과 만들어 낸 기술자들에 대한 감격이었던 것이지요. 누군가를 저렇게 행복하게 해 주는 지식, 곧 과학의 지식이란 얼마나 놀랍고 아름다운지,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다른 삶을 산다면 과학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과학의 지식은 아름답습니다. 인류의 자랑입니다. 지식에 왕좌가 있다면, 그 왕좌의 이름은 과학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겁니다. 사회적 갈등, 이념 간의 갈등, 국가 간의 경쟁에도 과학은 존중받습니다. “과학으로만 사는 세상이 가능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 이는 제 인생의 초년기에 가졌던 오래된 바람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라면 저는 과학주의자라 해도 부인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과학을 바라보는 저의 시선은, 멋진 연예인을 동경하는 팬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학의 지식은 영광스럽지만, 내 삶을 의지하기에는 너무 가냘프고 연약한 그대이기 때문입니다. 과학은 관찰에 의존하는 지식입니다. ‘관찰’하고, 관찰 결과들을 모아 ‘이론’을 세우고 ‘검증’을 통해 과학의 지식이 됩니다. 문제는 인간이 가진 관찰의 취약성입니다.


눈으로 별을 관측하던 시대, 인간의 우주에 대한 과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이었습니다.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관측하게 되었을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망원경을 통해 뉴턴의 우주관이 과학적 진리가 되었습니다. 뉴턴의 우주는 절대적 질서 아래 움직였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이를 무너뜨렸습니다.

이제 우주로 쏘아 올려진 제임스 웹 우주망원경(James Webb Space Telescope, JWST)이,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우주의 사진들을 보내오고 있습니다. 우주에 대한 우리의 과학을 어떻게 바꾸어 놓을지 알지 못합니다. 이는 곧 “우주가 생각보다 일찍, 훨씬 빠르게 은하를 형성했을 수 있다”라는 가설과 함께, 아인슈타인이 세워 놓은 상대성 이론 틀 또는 표준 우주론이 여전히 완성된 것이 아님을 시사합니다.


그렇기에 이 과정은 그저 ‘과학이 또 다른 발전 단계로 가는 모습’이라는 점에서, “과학은 절대 변하지 않는 진리”가 아니라, 관측과 이론이 함께 진화하는 유동적인 지식임을 보여 주는 대표적 사례가 될 수 있습니다. 과학은 진리를 향해 나아가지만, 그것은 완전한 도착점이 아니라 끊임없이 바뀌는 과정입니다.

과학의 지식은 너무 좁습니다. 그에 반해 우리의 삶은 너무나 커다랗습니다. 우리가 갖는 질문에 과학이 답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가족이 아플 때, 의사의 지식은 구원자가 됩니다. 그러나 가족을 잃을 때, 과학은 답을 하지 못합니다. 누군가를 향한 원망의 마음, 누군가를 향한 사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무엇을 위한 삶인지 과학으로는 답을 구할 수 없지요. 과학이라는 지식이 아름답지만, 모든 삶의 영역을 답하지는 못합니다.


대학 시절, 제가 좋아하던 교수님이 계셨습니다. 여름방학을 맞아 농촌 봉사활동을 출발하는 학생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 마을 사람들이 가물어서 기우제 한다고 하면 아무 말 말아라. 괜히 대학생이랍시고 ‘이런 거 해도 비 안 와요, 이거 미신이에요’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마을에서 쫓겨난다. 그분들이 그럴 거다. ‘야, 이놈들아, 우리가 뭐 몰라서 절하는 줄 아냐….’”

그 말씀을 하신 교수님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유물론자로 알려져 있던 분이셨습니다. ‘뭔가 멋진 말씀이다’ 생각했고,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러나 온전히 그 의미를 알기에는, 그땐 제가 어렸던 것 같습니다.


언젠가 아주 어린아이를 먼저 떠나보내며 울먹이던 젊은 엄마가 조그맣게 아기에게 말했습니다. “아가야, 천국에서 잘 지내. 엄마가 금방 찾아갈게. 조금만 기다려.”

아기가 어떻게 아프고 어떻게 떠나야 했는지는 의술이 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물음, “나의 아기는 어디로 갔나요?”라는 물음은 누가 답해 줄 수 있을까요? 어쩌면 그 엄마에게는 남은 삶에서 가장 큰 물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리석은 제자는, 교수님의 말씀을 많은 시간이 지나고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어쩌면, 무한한 시간 속에 무한한 시간이 더 흘러, 언젠가는 인류가 모든 물음에 과학으로 답할 수 있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을 살아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예술과 윤리학, 법과 종교, 문학과 역사가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이유겠지요. 아름답지만 너무나 가녀린 지식, 제가 사랑하는 과학의 지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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