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로소피아의 운명
111. 필로소피아의 운명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옆 반 친구가 정신이 이상해졌다는 소문이 들렸습니다. 호기심 많던 시절이라 쉬는 시간에 직접 찾아가 보았습니다. 굵은 뿔테 안경을 쓰고 머리가 덥수룩한 얼굴, 약간 상기되어 보이는 것 말고는 제가 볼 때에는 아무 문제없어 보였습니다. 아이들 사이에서 그 녀석이 갑자기 그렇게 된 이유가 전해졌는데,‘혼자서 철학책을 보다가 그렇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별 일 아니었지만, 제 기억에 철학이라는 단어와 관련된 처음 사건으로 떠오릅니다. 고등학교 1학년 어린 제 마음에 새겨진 건, “와 철학책이 무서운 거구나…”
대학을 가고 철학에 관련된 책을 과제로 보게 되었습니다. 책을 잡자 그때 일이 떠올랐습니다. 책을 펼치는데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혹시라도 나도 읽다가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지, 겁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나를 조금 긴장하게 만들었습니다. 어렴풋하게 실눈을 뜨고 책을 읽었습니다. 마치 귀신이나 못 볼걸 보는 것 같은 모습이었지요. 책을 읽으면서 몸에 힘이 들어가는 느낌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거 같습니다. 물론 철학 서적을 읽을 때 긴장하는 건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말로 사용하는 '철학'이라는 단어는 일본 개화기에 서양의 문명을 앞서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번역의 필요로 생겨난 단어입니다. 사실 생긴 지는 얼마 안 됐는데, 너무 많은 의미로 다양한 상황에서 쓰이면서, 오늘날에는 그 본래 의미를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생물학과에서는 생물에 대해서 배우고 화학과에서는 화학에 대해서 배웁니다. 법학과에서는 법에 대해서 배웁니다. 굳이 묻지 않아도 누구나 생각하는 이치입니다. 그런데 철학과에서는 무엇을 배우는지 묻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철학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입니다. 철학이란 학문은 애초에 그런 운명을 지고 태어난 학문이었던 것이지요.
Philosophy(필로소피, 철학)이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수학자로 알려진 피타고라스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지혜를 뜻하는 '소피아(sophia)'와 사랑을 뜻하는 '필로스(philos)'를 결합하여 '필로소피아'라는 단어를 만들었습니다. 이는 ‘지혜에 대한 사랑’, ‘지혜를 갈망하는 것’을 뜻합니다. 피타고라스는 자신을 ‘소포스(sophos, 지혜로운 사람)’가 아닌 '필로소포스(philosophos,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라고 칭했습니다.
피타고라스는 철학을 지식의 분야가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는 삶", 즉 애지자의 태도로 보았습니다. 그는 철학자를 지혜 자체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추구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말한 철학이란 말의 의미는 우리가 오늘날 학문으로서 말하는 ‘철학’의 의미보다는, 지혜를 향한 삶의 태도와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피타고라스에게 철학이란 지혜를 사랑하는 태도였다면, 시간이 지나며 철학은 단순한 삶의 자세를 넘어 보다 체계적인 탐구 방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리고 이 변화의 중심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에 대한 개념을 확립한 사람은 피타고라스 이후 2세기가 지나 등장한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학문의 제왕’이라고 불리는 그는 앞선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과 소피스트의 시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시대를 지나면서 쏟아져 나온 지식들을 정리하고 개별학문으로서의 체계를 마련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의 기원을 설명하고 그 목적과 방법론을 구체적으로 서술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책 <형이상학>에서 철학의 기원을 설명하면서 탈레스(Thales)를 최초의 철학자로 언급합니다. "탈레스는 물이 만물의 근원(Arche)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철학적 탐구를 시작했다."– 『형이상학』 983b
특히 그는 "철학은 근본 원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정의하며, 인간이 철학을 추구하는 이유와 철학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철학이란 곧 지혜 자체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는 분야입니다. 그렇기에 철학은 ‘최초의 학문’이고 ‘모든 학문’의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학문을 연구하는 방법을 체계화하기 위해, 지식의 영역을 분류하였습니다. 그는 최초로 학문을 다음과 같이 세 가지 영역으로 구별하였습니다.
(1) 이론적 학문 (Theoretical Sciences)
형이상학(Metaphysics): 존재의 본질과 근원을 탐구하는 학문 (오늘날의 철학, 신학)
자연학(Physics): 자연 세계를 연구하는 학문 (물리학, 생물학, 지리학)
수학(Mathematics): 수량과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 (수학, 기하학, 천문학)
(2) 실천적 학문 (Practical Sciences)
윤리학(Ethics):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연구하는 학문
정치학(Politics): 사회와 국가를 연구하는 학문
경제학(Economics): 재화와 분배를 연구하는 학문
(3) 창작적 학문 (Productive Sciences)
수사학(Rhetoric): 효과적인 말하기와 설득을 연구하는 학문
예술(Aesthetics): 미(美)와 감성을 탐구하는 학문
건축(Architecture): 구조와 공간을 연구하는 학문
이렇게 정리된 학문 체계는 서양 학문의 기초가 되었으며, 근대 학문으로 발전하는 틀을 제공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지식은 방법과 대상에 따라 구별되고 개별학문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철학은 어머니가 그러하듯이, 다양한 지식의 분야를 낳고 독립시킵니다. 지난 이천여 년 동안 많은 지식의 분야들이 철학에서 독립되었습니다.
고대: 자연학(물리학) / 윤리학 / 논리학
중세: 신학 / 법학 / 의학
근대: 천문학 / 물리학 / 화학 / 경제학 / 생물학
현대: 사회학 / 심리학 / 인지과학 / 데이터 과학
철학에서 출발한 학문들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독립적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과학적 방법론이 발전할수록 새로운 분야가 생기고, 학문은 더 세분화됩니다. 많은 아름다운 학문들 속에 철학의 전통이 남아있습니다. 이론을 연구하는 분야에서 박사학위의 이름 속에 철학의 유전자가 전해집니다. Ph.D. 는 Doctor of Philosophy의 약자로, 다양한 학문 분야에서 수여되는 박사 학위입니다. Ph.D. in Literature (문학 박사), Ph.D. in Economics (경제학 박사), Ph.D. in Physics (물리학 박사), Ph.D. in Biology (생물학 박사) Ph.D. in Engineering (공학 박사)와 같은 학위 이름 속에서 그 자취를 남기고 있는 것이지요. 나이 든 어머니와 같은 모습으로 때로는 의미도 모호한 철학은 여전히 학문들의 기초가 되는 방법론과 이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위기는 슬기의 위기입니다. 넘쳐나는 지식의 홍수 속에 우리는 떠밀려 표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요? 양질의 지식, 신뢰할 수 있는 지식보다는, 악의적인 목적을 가진 거짓 정보들로 인해서 개인의 삶이 위협받고 공동체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진리와 지식에 둔감해져 버린 이유가 아닐까요? 1부, 지식의 스펙트럼이라는 제목으로 다양한 지식의 양상과 층위에 대해 이야기한 이유는 이런 지식의 모습에 대한 이해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교양이고 지혜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철학은 단순한 사색이 아니라, 인간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근본적인 도구였습니다. 철학을 통해 우리는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며, 신뢰할 수 있는 지식을 축적해 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넘쳐나는 정보 속에서 우리는 더 쉽게 감정에 휩쓸리고, 논리보다 직관을 앞세우며, 서로를 이해하는 대신 자기 확신 속에 갇혀버리는 경향이 강해졌습니다.
그렇기에 철학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철학은 단순히 지식의 어머니였던 과거의 학문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가 신뢰할 수 있는 사고의 기초를 다지고, 올바른 판단을 내리는 힘을 길러줍니다. 논리와 비판적 사고, 그리고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철학적 성찰이야말로, 우리의 개인적 삶뿐 아니라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역할을 합니다.‘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삶이 나와 공동체의 희망이 될 겁니다.
철학책을 많이는 아니더라도 제법 보고 깨달았습니다. ‘철학책을 혼자 봐서 정신이 이상해졌다’라는 이야기는 말도 아니고 방귀도 아닌 거죠. 말도 아니고 방귀도 아닌 이야기들로 피곤한 세상입니다. 이 시대를 향한 오래된 지혜의 여신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