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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지식 이후 - 포스트 모더니즘이 오다

모던뽀이, 모던걸

by 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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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장. 지식 이후 - 포스트 모더니즘이 오다

‘모던(modern)’이라는 말은 제게 특별한 느낌을 주는 단어입니다. 매력적이고 낭만적입니다. 모던이라는 말이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이 언제인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는 없습니다. 아마도 개항기 이후에 서양문물이 들어오는 가운데 함께 전해졌으리라 여겨집니다.

당시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국가적으로는 암흑기, 시련의 시기였지만, 한편으로는 서구의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새로운 멋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머리를 짧게 깎고 머리에는 맥고모자를 쓴 젊은 남자와. 양산을 들고 장갑을 끼고, 세련된 단발머리의 그녀들. 그들을 ‘모던 뽀이’, ‘모던 걸’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을 통해 암혹한 환경에도 굴하지 않고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생명의 본성을 보게 됩니다. 비록 우리가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강요된 모던이었지만, 나라 잃은 어두운 시대에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래서 ‘모던’이라는 말은 제게는 촌스러움과 사랑스러움, 낭만의 느낌으로 다가옵니다. 모던 패션은 당시 사회의 변화와 문화적 흐름을 반영하며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포스트모던(postmodernism)은 두 단어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포스트(post)”는 영어로 ‘이후의(after)’라는 의미입니다. 모던은 ‘근대”를 뜻합니다. 둘의 의미를 합해서 “포스트모던(post-modern)”은 “근대(모던) 이후의”라는 의미를 나타냅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이름입니다. 포스트 모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대’라는 시대의 의미를 이해해야 합니다.


근대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이 되었습니다. 계몽주의 시대는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전체를 포괄하는 시기로, 이성적인 사고와 과학적 방법론을 통해 사회의 낡은 관습과 미신을 타파하고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강조하는 것을 목표로 했습니다.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근대인들은 이성을 통해 세상을 변혁하고 진보를 이룰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인간 이성의 힘에 대한 낙관이 근대의 핵심이었습니다. 과학의 발전과 산업혁명을 통해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고 사회를 개선할 수 있으리라는 진보의 신념이 퍼져나갔습니다. 실제로 증기기관과 전기, 의학의 발달 등 근대의 역동성은 삶의 방식을 급격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근대의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등장한 흐름입니다. 더 이상 과거의 방식으로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이전 계몽 시대에 보편적이라고 여겨지던 진리나 가치들이 의심받고 도전받습니다. 이 세계를 구성한 사상이나 철학 문화와 종교의 모든 지식들이 더는 절대적 권위를 갖지 못한다는 인식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역사적 맥락을 통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배경에는 19~20세기에 인류가 겪은 역사적 격변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근대의 이성에 대한 신뢰와 과학의 진보는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가져왔습니다. 한편으로 산업화와 식민지 개척을 통해 유럽 열강들은 전 세계로 영향력을 넓혔습니다. 제국주의 시대에 서구인들은 자신들이 가장 문명화되었으며, 식민 지배를 통해 미개한 지역에 문명을 전파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 뒤에는 막대한 착취와 폭력이 숨어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19세기말 벨기에의 콩고 식민지 경영이나 아프리카, 아시아에서 자행된 학대는 근대 문명이 주장한 인도주의와 모순되는 것이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경쟁은 결국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참혹한 충돌로 이어졌습니다. “우리의 포스트모던 시대는 1914~1918년의 세계대전으로 개막되었다.” 영국 역사가 아널드 토인비의 이 말은 1차 대전이 인류 역사에 거대한 전환점이 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전까지 진보와 문명을 자랑하던 유럽 사회는, 최첨단 무기가 동원된 참호전과 학살 앞에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전쟁 이후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이 깊은 환멸감에 빠졌습니다.

이어 벌어진 제2차 세계대전은 인류에게 더욱 결정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이성적이라고 믿었던 인간이 홀로코스트와 같은 끔찍한 만행을 저지를 수 있음이 드러났고, 과학 문명의 정점에서 만들어낸 원자폭탄은 순식간에 하나의 도시를 잿더미로 만드는 파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두 발의 핵폭탄은 수십만의 목숨을 앗아갔고, 살아남은 이들에게도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더욱이 핵무기의 등장은 인류가 스스로 지구적 차원에서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음을 의미했습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은 지구상의 모든 생명을 스스로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은 것입니다. 이는 동시에 인류가 감당해야 할 두려움과 책임도 그만큼 커졌음을 뜻했습니다.


제2차 대전 이후 세계는 급속히 재편되었습니다. 유럽의 제국들은 속속 식민지에서 손을 떼야했고,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는 수많은 신생 독립국이 탄생했습니다. 냉전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세계질서 속에서, 더 이상 한두 국가나 이념이 전 세계를 획일적으로 이끈다는 생각은 설 자리를 잃어갔습니다.

전쟁의 참화와 대량살상 병기의 등장은 인류로 하여금 기존의 낙관적 믿음을 돌아보게 했습니다. "과연 이성이 우리를 항상 올바른 길로 이끄는가?" 하는 물음, 그리고 "진보의 끝에 무엇이 기다리는가?" 하는 회의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근대 문명이 자랑하던 밝은 면 뒤에 드리운 거대한 그늘을 마주하게 된 것이지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쌓이면서, 근대에 대한 반성으로서 포스트모던의 감수성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특히 1960년대 이후로 서구 사회에는 기존 질서에 대한 전방위적 반동(反動)이 나타났습니다. 2차 세계대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세계 곳곳에서 사회 문화적 혁명이 일어난 것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서방에서는 학생운동과 흑인 민권운동이 일어나 인종차별과 베트남 전쟁에 저항했고, 세계적으로 탈식민지화가 진행되면서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제3세계 담론들이 부상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여성운동(페미니즘)’이 성 역할의 고정관념을 깨뜨렸고, 기존 권위에 도전하는 반문화(counterculture) 운동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들은 모두 과거의 전통이나 권위를 해체하고 새로운 가치를 모색한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바로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타고 1960-70년대에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본격적으로 대두되었습니다. 68 혁명으로 상징되는 학생과 노동자들의 저항 운동, 구조주의 철학에 대한 반작용으로 등장한 탈구축(해체) 사상 등 지적 혁신이 활발했던 프랑스에서, '포스트모던'이라는 말이 철학과 예술 담론 속에 자주 등장하게 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토대를 놓은 인물로는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데리다는 기존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뒤흔드는 급진적 발상을 제시했는데, 이를 가리켜 탈구축(해체)이라고 합니다. 데리다의 해체 철학은 한 마디로 "중심을 해체하고 주변부의 목소리에 주목하라"는 것이라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모든 사유와 체계의 중심에 의심을 던지고, 숨겨진 모순이나 이면을 밝혀내는 작업입니다. 데리다를 비롯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Jean-François Lyotard),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 등은 기존의 거대한 이론 체계나 담론보다는 개별적이고 다원적인 관점을 중시하는 철학으로 전환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매우 특이한 ‘이즘(-ism)’입니다. 역사상 존재했던 던 수많은 사상, 철학, 운동, 주의에는 모두 '주창자'가 있고 뜻을 같이하는 '집단'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이라 불리지만, 주창자도 없고, 집단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포스트모던을 이해할 때, 특정한 이론의 체계나 신념으로 보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2부 ‘슬기의 위기’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포스트 모더니즘을 이야기하는 것은, 한 개별 학파의 사상으로 가 아니라,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거창한 철학 담론 속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우리의 현실 세계를 설명하는 용어입니다. 각자가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서로 다른 정보를 접하고, 전 지구적 문화가 뒤섞인 콘텐츠를 소비하며, 절대 불변의 진리 대신 유연한 사고를 요구받는 지금의 삶 자체가 이미 포스트모던한 것입니다. 하나의 거대한 이야기 대신 수많은 작은 이야기들이 공존하고, 권위보다는 담론이, 본질보다는 맥락이 중시되는 세상. 그것이 바로 지금 우리의 시대상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우리 시대를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제가 이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이야기할 때는 개별 이론체계로서의 포스트모던 사상체계를 뜻하지 않습니다. 사실 포스트모던은 정확한 정의도 주류의 이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 현상들을 뜻하는 의미로 사용하겠습니다. 아마도 ‘포스트모던스러운’’또는 포스트 모던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겠지요. 이는 가치판단을 유보한 중립적 기술적 표현임을 밝힙니다.

슬기의 위기는 어쩌면 ‘포스트모던적’ 위기입니다. 우리의 시대 ‘모스트모던적’인 과제들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떠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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