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흔들리는 진실 - 내가 너의 아버지다
스타워즈의 주인공 루크 스카이워커에게 있어 다스 베이더는 절대악을 상징하는 존재였습니다. 루크가 존경하던 제다이 스승들은 그를 악의 화신으로 이야기했습니다. 루크의 아버지(아나킨 스카이워커) 또한 스승들과 같은 제다이였습니다. 젊은 기사 다스 베이더가 어둠의 세력에 빠져들면서 루크의 아버지를 배신하고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루크에게 있어서 다스 베이더는 절대의 악이자, 원수로서 등장하는 것이 스타워즈 1편의 루크와 다스 베이더의 관계였습니다.
이어서 제작된 속편 ‘제국의 역습’ 편에서 어쩌면 영화사상 최고의 명대사라고 할 수도 있는, ‘내가 너의 아버지다 (No, I am your father)'라는 이야기를 다스 베이더의 입을 통해 주인공 루크는 듣게 됩니다. 다스 베이더와 대결 중에 부상을 당한 루크는 충격을 받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게 됩니다. 다스 베이더가 자신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그의 세계관을 산산조각 내어버립니다. 그 순간 관객들도 함께 충격에 빠집니다.
단순히 ‘선(善)과 악(惡)’으로 구분되어 있던 캐릭터 구도가 뒤흔들립니다. 루크 입장에서는 그토록 증오해 온 적이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사실과 함께 아나킨이 어둠의 세력에 가담하게 된 이유들도 밝혀집니다. 가족을 사랑했던 그는 임신한 아내 파드메가 죽을 것이라고 하는 신탁을 받게 됩니다. “아내를 살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힘이 필요하다”는 집착이 생기고, 이것이 어둠의 포스를 선택하게 되는 결정적 동기가 됩니다. 선악의 경계가 무너지고 삶의 다층적인 의미가 드러나는 순간인 것이지요.
폭로 이후 루크는 큰 혼란에 빠지지만, 결국 이 새로운 진실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그는 이전처럼 단순히 베이더를 증오하고 처단해야 할 대상으로만 보지 않게 됩니다. 오히려 베이더 안에도 선한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품게 됩니다. 세계가 뒤집히는 아픔을 겪은 덕분에 루크가 악에 맞서는 방식에도 변화가 생깁니다. 이제 그는 적대와 분노 대신 이해와 구원의 마음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합니다.
실제로 이후 이야기에서 루크는 다스 베이더에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다시 찾아내고, 결국 그를 어둠에서 구해냅니다. 루크가 겪은 충격과 혼란은 그를 성장시켜 세상을 보는 시야를 넓혀주었습니다. 이처럼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은 비록 고통스럽지만, 그로 인해 우리는 현실의 다층적인 모습을 깨닫고 더 성숙한 시각을 갖게 됩니다.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에서도 주인공은 믿음이 뒤흔들리는 순간을 겪습니다. 덴마크 왕자 햄릿은 사라진 아버지의 유령으로부터 충격적인 진실을 전해 듣지요. 자신의 아버지가 자연사한 것이 아니라, 삼촌 클로디어스에 의해 암살당했다는 사실은 햄릿의 내면을 송두리째 뒤흔듭니다. 한순간에 세상의 도덕적 질서가 뒤집힌 듯한 이 경험 앞에서, 햄릿은 깊은 배신감과 혼란에 빠집니다.
햄릿은 이 뒤틀린 진실을 받아들인 후 극심한 내적 갈등과 고뇌를 겪게 됩니다. 예전의 그는 세상을 어느 정도 질서 있고 예측 가능한 곳으로 여겼다면, 이제는 모든 것이 의심스럽고 불안합니다. 그는 사랑했던 사람들마저 의심하고, 삶과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고민하며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는 유명한 독백을 남깁니다.
비록 햄릿의 선택과 행동은 비극으로 치닫지만,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변화는 인간이 진실의 동요 앞에서 얼마나 깊이 고민하고 방황하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햄릿의 이야기는 믿음이 깨질 때 겪는 아픔과 혼란도 결국 인간 경험의 일부이며, 그 과정을 통해 삶의 복잡한 윤리적 문제들과 마주하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역사 속 현실에서도 믿음이 흔들리는 경험은 개인과 사회를 변화시켰습니다. 1980년대 대학가에 ‘의식화 교육’이라는 용어가 등장했습니다. 자녀를 공부시켜 대학으로 진학시켰던 부모님들의 마음을 놀라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채 한 학기가 지나기도 전에, 성실하고 순수했던 아들과 딸이 마치 혁명 운동가 같이 변화된 모습을 나타났습니다. 자녀의 행방을 묻는 경찰의 추궁에 많은 부모들이 눈물 흘리기도 했습니다.
의식화 교육이란 사실 별다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학생운동권이 주도하던 대중 강연이나 토론 등을 통해, 정권의 폭력이나 검열로 가려진 사실을 접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청소년기를 당시 군부독재 권위와 교육에서 누구보다 충실하게 지난 아이들이 역사와 사회를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한 것이었습니다. 곧 현실의 부조리와 불의를 목격하면서 사회에 대한 인식이 급격히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검열로 가려져 있던 진실이 서서히 드러나고, 예전엔 옳다고 믿었던 것이 실은 거짓이었음을 깨닫는 순간들이 찾아온 것입니다.
이러한 의식화 과정을 거치며 대학생들은 커다란 내적 각성을 경험했습니다. 진실이 흔들리는 혼란 속에서 그들은 분노와 슬픔을 느꼈지만, 동시에 스스로 행동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새로운 가치관을 얻었습니다. 예컨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의 진상을 접한 학생들은 국가에 대한 신뢰가 깨졌지만, 그 깨진 자리에서 민주주의와 정의라는 더 큰 진실을 찾아 나섰습니다. 많은 이들이 거리로 나가 독재에 항거하며, 이전 세대와는 다른 길을 걷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 각자의 개인사 속에서도 진실이 흔들리는 순간은 찾아옵니다. 어린 시절의 우리는 부모님을 전지전능하고 완벽한 존재로 믿곤 합니다. 부모님 말씀은 절대적인 진실이며, 부모님 자체가 선과 정의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하지요. 하지만 자라나면서 문득 부모님도 실수하고 약한 모습을 보일 때, 우리는 당혹감과 실망을 겪습니다. 완벽해 보이던 부모님의 모습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순간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깨달음은 성숙한 사랑과 이해로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부모도 한 명의 불완전한 인간임을 알게 되면서, 우리는 비로소 부모님을 현실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반항심이나 거리감이 생기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환상이 깨지며 겪는 충격은, 한 인간으로서 부모를 이해하고 또 나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어른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발판이 됩니다.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자신이 믿어 온 진실이 흔들리는 경험을 합니다. 그 순간이 때로 힘겹지만 세상을 더 겸허하고 지혜로운 눈으로 보게 됩니다. 소년과 소녀가 어른이 되는 순간입니다. 세상이란 결코 선과 악, 흑과 백처럼 단순한 이분법으로 이루어진 곳이 아니라, 서로 다른 관점과 진실들이 겹겹이 쌓인 다층적인 세계임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지요.
고통스럽더라도 진실의 균열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장의 문턱을 넘어설 용기와 지혜를 얻게 됩니다. 이처럼 믿었던 진실이 흔들리는 순간들은 우리 삶에 깊은 깨달음의 선물을 남기며, 한 인간으로서 한층 더 성숙한 세계관을 갖추도록 이끌어주는 것입니다.
한바탕 폭풍이 지나간 하늘은 이전보다 더 푸르고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