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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장. 해체의 전통과 회의 - 데카르트를 추억

회의와 해체

by 결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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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o, quid tum?

16장. 해체의 전통과 회의 - 데카르트를 추억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뜰안을 서성이는 장자의 모습을 보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장자가 말했습니다. “꿈에 내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깨고 나니,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장자는 오래전 자신이 꾼 나비의 꿈을 자신의 책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즐거워 그 뜻에 맞았다. 장주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문득 깨니 곧 깜짝 놀라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인류는 오래전부터 ‘대상(실재)’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에 대해 주목해 왔습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실제의 사물 사이에 발생하는 괴리에 대해 동서양의 여러 현인들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불교의 핵심 교의 중 하나인 무상(無常)과 무아(無我)도 “모든 것은 변하며 영원한 실체가 없음”을 가르칩니다. 금강경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즉 “이 세상 모든 형성된 것은 꿈과 환영과 물거품과 그림자와 같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듣고 보는 현실 세계가 꿈같이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이지요.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도 현상과 실재의 괴리에 대한 깨달음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의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진리와 인식의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소피스트란 고대 그리스의 철학 교사이자 변론가들로, 대표적으로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식과 진리에 대해 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했는데, 이것이 바로 기존 절대적 진리관에 대한 일종의 해체라 볼 수 있습니다. 우선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매우 유명하지요.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의 진리는 그것을 인식하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의미입니다.

고르기아스는 이보다 더 나아가 극단적 회의주의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논증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설사 무언가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으며, 알 수 있다 해도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그 의도는 ‘확실성 없음’에 대한 극단적 선언이었습니다.

이들의 통찰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의구심 “보편적 진리나 거대담론을 신뢰할 수 있는가?” 와도 맥을 같이합니다. 소피스트들은 기존의 ‘진리’ 개념을, 오늘날 해체의 개념과는 조금 다르지만, 해체함으로써, 인간 인식의 주관성과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의심을 촉발함으로써 후대 철학자들에게 회의와 해체의 틀을 제공했습니다.


회의(懷疑. doubt)란 ‘어떤 사실이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품고 믿지 못하거나, 확실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의론(Skepticism)은 인간이 세상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회의론자들은 감각, 이성, 경험 등을 통해 얻는 지식이 불완전하거나 오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절대적인 진리나 확실한 지식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봅니다.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데카르트는 ‘회의’를 학문의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데카르가 택한 회의의 방법을 “방법적 회의(Methodic Doubt)”라고 합니다. 의심을 위한 의심이 아니라. 진리를 위한 수단으로써, 의심을 방법으로 사용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그의 저서 <방법서설>에서 제시한 철학적 방법론입니다. 근대(모던)에 대해 반발해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이 택한 수단과 근대를 대표하는 데카르트가 택한 방법이 동일한 "회의와 해체"인 것이 공교롭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의 지식들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정말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지식이란 무엇일까?”를 찾기 위해, 그는 과감하게 "모든 것을 의심해 보자"라는 극단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감각이 때로는 우리를 속이므로 감각 경험을 의심했고, 심지어 지금 이 순간이 꿈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아가 사악한 악마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조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까지 세웠습니다.


이렇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끝에 데카르트가 도달한 결론은 너무도 유명한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의심해도, ‘지금 의심하고 있는 나(주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분명하다는 통찰이었습니다. 이렇듯 데카르트는 의심을 해체의 도구로 삼았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해체 자체가 아니라 불변의 확실성을 발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데카르트의 "비판적 계승자"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목적이나 방법에 있어서는 다르다 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고자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의 상대성을 강조합니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려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기존의 지식, 권력, 담론 등의 지배적인 구조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렇지만, 가능한 모든 지식을 의심하고 해체한다는 점에 있어서 닮아 있습니다.


기존의 지식에 대한 회의와 해체의 과정은 '개인의 성장' 속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인간 인식은 때로 기존의 신념을 해체함으로써 한 단계 성장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나 사회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따릅니다. 순진한 현실 수용 단계라고 할까요. 그러나 성장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종종 권위와 통념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사춘기 즈음이 되면 “왜 꼭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존 질서에 반항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권위나 기존 지식을 해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기를 거치며, 우리는 자기만의 사고를 형성해 갑니다.


저의 인식의 과정도 그러했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내리는 듯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어려서 배운 진리들이 흔들렸습니다.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역사는 지배와 굴종의 역사였습니다. 인간의 마땅한 도리라고 믿었던, 충과 효는 지배자들이 백성을 다스리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던 사랑이라는 가치조차도 인간의 욕망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흔들렸습니다.

인식 너머 진실은 닿을 길 없고, 현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데카르트 같은 “방법으로서의” 회의가 아니라, 미숙한 저는 어쩌면 “감정으로서의” 회의에 빠져버린 것이었습니다. 회의를 위한 회의는 저의 존재마저 믿을 수 없는 지독한 상태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라고?(Cogito, quid tum?) ''의 태도였던 것이지요.


그때의 이야기는 3부로 넘기고자 합니다. 저의 감정적 회의는 무정부주의(국가나 정부와 같은 체계를 거부하는 사상), 또는 지독한 염세의 날들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일상적인 판단과 선택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하지?”, “도대체 삶이란 이유가 뭐지?” 혼란과 불안이 끊임없이 제 마음을 휘몰아쳤습니다.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주장하는 자유나 자발적 결합의 가치는 온전히 알지 못하고, 그것이 곧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전부 무너뜨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어지면,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끝 모를 허무에 빠질 수 있도 있는 것이지요.


포스트모던의 시작과 의도는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영원한 해체, 끝없는 해체를 모토로 삼아, 달려온 ‘지금, 여기’어쩌면 우리 시대의 모습은 아나키즘의 종말론적인 모습은 아닌가요. 깃발도 내려졌고, 노래도 멈춘 지 오래입니다. 모든 의미는 흩어졌고 각자 파편화된 개인들이 고립된 채 자기만의 말들 속에 갇혀 삽니다. 공동체의 갈등은 극에 달해서 전 세계가 극단의 갈등으로 위태롭습니다.

옛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해체적 사유 끝에 도(道), 이데아, 깨달음, 코기토 같은 나름의 확실성 혹은 긍정적 결론을 찾았습니다. 다시 말해, 해체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해체를 통한 재구성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해체가 끊임없이 해체만 거듭한다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폐허 속에 공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의 의도가 곧 허무주의인 것은 아닙니다. 다양한 관점과 주변부 목소리를 드러내면서, 더 풍부한 의미를 발견하기 위한 시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실제로 해체 이후를 책임감 있게 고민하지 않으면, 영원한 해체의 미궁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가?"라는, 어쩌면 궁핍해 보이는 물음을 이제는 한 번쯤 물어볼 때가 된 것은 아닌지.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데카르트의 추억은 저의 젊은 날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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