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비판과 해체의 전통: 데카르트를 추억함

by 결휘

평소와는 다른 모습으로 뜰 안을 서성이는 장자의 모습을 보고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승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장자가 말했습니다. “꿈에 내가 나비가 되어 훨훨 나는 꿈을 꾸었는데 꿈에서 깨고 나니, 내가 나비가 된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구나” 장자는 훗날 자신이 꾼 나비의 꿈을 자신의 책 <장자>의 제물론(齊物論)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는데, 훨훨 나는 나비가 되어 스스로 즐거워 그 뜻에 맞았다. 장주인 줄을 알지 못하였다. 문득 깨니 곧 깜짝 놀라 장주가 되었다.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된 것인지, 나비가 꿈에 장주가 된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호접지몽, 胡蝶之夢)


인류는 오래전부터 ‘대상(실재)’과 ‘인식’ 사이에 존재하는 불일치에 대해 주목해 왔습니다. 우리가 인식하는 세계와 실제 세계(실재) 사이에 간극이 존재합니다. 불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인 무상(無常, anicca)과 무아(無我, anatta) 역시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하며 영원하고 고정된 실체란 없음”을 가르칩니다. <금강경(金剛經)>에서는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즉 “이 세상 인연 따라 만들어진 모든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고, 물거품과 같고, 그림자와 같다”라고 설합니다.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고 듣고 보는 이 세계가 실은 꿈처럼 덧없고 허망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서양 철학의 전통에서도 현상과 실재의 괴리에 대한 깨달음은 오래전부터 있어 왔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은 인간 인식의 한계를 ‘의심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또한 진리와 인식의 문제를 정면으로 제기했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와 고르기아스(Gorgias)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지식과 진리에 대해 상대주의적 관점을 취했는데, 이는 당시 절대적 진리관에 대한 일종의 '해체'라 볼 수 있습니다.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주장은 매우 유명하지요.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Homo mensura)”라고 선언했습니다. 이 말은 “모든 것의 참됨(진리)은 그것을 인식하는 각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상대주의>를 주장합니다. 고르기아스는 이보다 더 나아가 극단적인 <회의주의(Skepticism)>를 보여주었습니다. 그가 남긴 유명한 세 가지 논증은 이렇습니다. “①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② 설사 무언가 존재한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③ 설사 알 수 있다 해도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수 없다.” 물론 수사학적인 과장이 섞인 표현이지만, 그 의도는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한 ‘확실성 없음’을 극단적으로 선언하는 데 있었습니다.


이들의 통찰은 바로 앞 장에서 다룬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의구심, 즉 “보편적 진리나 거대담론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는가?” 와도 맥을 같이합니다. 소피스트들은 기존의 ‘진리’ 개념을 (오늘날의 해체 개념과는 결이 조금 다르지만) 비판하고 상대화함으로써, 인간 인식의 주관성과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그렇게 지식의 확실성에 대한 의심을 촉발함으로써 후대 철학자들에게 회의와 해체의 사유 방식과 틀을 제공했던 것입니다.

회의(懷疑. doubt)란 ‘어떤 사실이나 주장에 대해 의문을 품고 믿지 못하거나, 확실한 판단을 유보하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회의론(Skepticism)은 인간이 세상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철학적 입장입니다. 회의론자들은 감각, 이성, 경험 등을 통해 얻는 지식이 불완전하거나 오류 가능성이 늘 있다고 주장하며, 절대적인 진리나 의심 불가능한 확실한 지식은 인간에게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 해도 결코 알 수 없다고 봅니다.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받는 철학자 데카르트(Descartes)는 바로 이 ‘회의’를 자신의 철학을 세우는 방법으로 삼았습니다. 데카르트가 택한 회의의 방법을 “방법적 회의(Methodic Doubt)”라고 합니다. 이는 의심을 위한 의심이나 불신이 아니라, 결코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진리를 찾기 위한 수단으로서 의심을 도구로 사용한다는 뜻입니다. 이는 데카르트가 그의 저서 《방법서설(Discours de la méthode)》에서 제시한 핵심적인 철학의 방법론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근대(모던) 정신의 토대를 놓은 데카르트가 택한 방법과, 그 근대에 반발하며 등장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즐겨 사용하는 수단이 각각 ‘회의’와 ‘해체’라는 점이 공교롭습니다. 데카르트는 자신이 그동안 배우고 믿어온 지식들이 과연 확실한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단 하나의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찾기 위해, 그는 과감하게 “의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일단 거짓으로 간주하자”라는 극단적 입장을 취했습니다.


감각은 때때로 우리를 속이므로 감각 경험을 의심했고, 생생한 꿈과 현실을 구분하기 어려우므로 지금 이 순간이 꿈일 수도 있다고 의심했습니다. 나아가 전능하지만 사악한 악마가 존재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예컨대 2+3=5라는 수학적 진리조차) 교묘하게 조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설까지 세웠습니다.

이렇게 의심에 의심을 거듭한 끝에 데카르트가 도달한 단 하나의 확실한 진실은 너무도 유명한 “코기토 에르고 숨(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였습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의심하고, 심지어 사악한 악마가 나를 속인다 할지라도, ‘그렇게 의심하고 생각하고 있는 나 자신(사유하는 주체)’의 존재만큼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는 통찰이었습니다. 이렇듯 데카르트는 의심을 해체의 도구로 삼았지만, 그 궁극적 목적은 해체 자체가 아니라 의심 불가능한 불변의 확실성(코기토)을 발견하고 그 위에 철학의 체계를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현대의 포스트모더니즘은 데카르트의 회의 정신을 이어받은 "비판적 계승자"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목적이나 결론에 있어서는 정반대의 길을 걷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데카르트는 주관적 확실성(코기토)을 통해 객관적 진리(신, 세계)로 나아가고자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오히려 그러한 보편적/객관적 진리의 가능성 자체를 의심하며 진리의 상대성과 다원성을 강조합니다. 데카르트는 이성을 통해 궁극적 진리에 도달하려 했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 자체를 포함한 기존의 지식, 권력, 담론 등의 지배 구조를 폭로하고 비판하는 데 주된 목적을 둡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한 모든 주장과 믿음을 의심하고 해체한다는 방법론적 태도에 있어서는 분명 닮아 있습니다.


기존의 지식에 대한 회의와 해체의 과정은 '개인의 성장' 속에서도 나타나는 모습입니다. 인간 인식은 때로 기존의 신념을 해체함으로써 한 단계 성장합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나 사회로부터 전해 들은 것을 그대로 믿고 따릅니다. 순진한 현실 수용 단계라고 할까요. 그러나 성장이 진행되면서 우리는 종종 권위와 통념에 의문을 품게 됩니다. 사춘기 즈음이 되면 “왜 꼭 그래야 하지?”라는 질문을 던지며, 기존 질서에 반항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권위나 기존 지식을 해체적으로 바라보는 시기를 거치며, 우리는 자기만의 사고를 형성해 갑니다.


저의 인식의 과정도 그러했습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듯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어야 했습니다. 어려서 배운 진리들이 흔들렸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소중했던 ‘사랑’이라는 가치조차 생물학적 호르몬 작용이나 사회적 계약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며 흔들렸습니다. 인식 너머 진정한 진실은 닿을 길 없고, 현실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데카르트와 같은 “방법으로서의” 회의가 아니라, 미숙한 저는 어쩌면 “감정으로서의” 회의에 빠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진리를 위한 회의가 아닌 회의를 위한 회의는 저의 존재마저 믿을 수 없는 지독한 상태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런데 어쩌라고?” 'Cogito, quid tum?'의 태도였던 것이지요.


그때의 이야기는 2부로 넘기고자 합니다. 저의 감정적 회의는 무정부주의(국가나 정부와 같은 체계를 거부하는 사상), 또는 지독한 염세의 날들로 저를 이끌었습니다. 일상적인 판단과 선택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집니다. “무엇을 믿고 살아가야 하지?”, “도대체 삶이란 이유가 뭐지?” 혼란과 불안이 끊임없이 제 마음을 휘몰아쳤습니다. 아나키즘(무정부주의)이 주장하는 자유나 자발적 결합의 가치는 온전히 알지 못하고, 그것이 곧 모든 것을 의심하고 전부 무너뜨려야 한다는 뜻으로 이어지면, 궁극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끝 모를 허무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어쩌면 포스트모던의 시작과 의도는 아름다운 것이었지만, 영원한 해체, 끝없는 해체를 모토로 삼아, 달려온 ‘지금, 여기’의 어쩌면 우리 시대의 모습은 아나키즘의 종말론적인 모습은 아닌가요. 깃발도 내려졌고, 노래도 멈춘 지 오래입니다. 모든 의미는 흩어졌고 각자 파편화된 개인들이 고립된 채 자기만의 언어 속에 갇혀 삽니다. 공동체의 갈등은 극에 달해서 전 세계가 극단의 갈등으로 위태롭습니다.

옛 사상가들은 자신들의 해체적 사유 끝에 도(道), 이데아, 깨달음, 코기토 같은 나름의 확실성 혹은 긍정적 결론을 찾았습니다. 다시 말해, 해체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해체를 통한 재구성이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포스트모던 해체가 끊임없이 해체만 거듭한다면, 결과적으로 아무것도 남지 않는 폐허 속에 공허의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우리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살고 있는가?"라는, 어쩌면 궁핍해 보이는 물음을 이제는 한 번쯤 물어볼 때가 된 것은 아닌지. 제가 글을 쓰는 이유입니다. 데카르트의 추억은 저의 젊은 날의 추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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