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끝없는 해체: 오징어 게임

by 결휘

넷플릭스의 세계적 화제작 <오징어 게임>의 한 장면입니다. 극한 상황에 내몰린 참가자들이 서로를 해치려 아수라장이 된 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혼란 속에서 한 노인이 두려움에 떨며 절규합니다. “그만해, 이러다가 다 죽어!” 결국 싸움을 멈추지 않으면 모두가 죽게 될 거라는, 간절하고도 처절한 외침이었습니다.

작품 속 그의 ‘정체’를 암시하는 복선이기도 하지만, 저는 이 장면이 어쩌면 우리의 현실을 보여주는 강력한 은유라고 생각합니다. 서로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해체하기만 하다 보면, 어느새 그 칼끝이 자신을 포함해 모두를 해치는 결과로 돌아올 수 있다는 것이지요. 노인은 모두를 위해 ‘지금’ 멈추어야 함을 외쳤던 것입니다.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우리 시대 포스트모더니즘은 전후(戰後) 시기에 기존의 거대한 서사들을 의심하며 등장했습니다. 두 번의 세계대전, 핵전쟁의 공포가 도사리던 시대, 개인은 ‘거대한 국가 기계’의 부속품처럼 소모되고 있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정말 이 체계가 옳은 것인가?”라는 근본적 의문이 제기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골리앗을 향해 물맷돌을 던지던 다윗처럼, 낡은 권위와 담론에 돌을 던지며 기존의 질서에 도전했습니다.

이런 회의와 비판의 도전은 지식의 역사 가운데 낯설지 않습니다.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들(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부터 이미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상대주의적” 주장이 등장했습니다. 비판 철학으로 근대를 열었던 데카르트 역시 “의심”과 “회의”를 철학의 방법론으로 삼았습니다. 그가 발견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명제는 그 치열한 ‘해체’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칸트(Kant) 역시 인간 이성이 ‘사물 자체(Ding an sich)’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한계를 지적하며 절대 진리의 가능성에 균열을 냈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회의와 해체의 오랜 전통 가운데 다시 한번 그 기치를 높이 든 셈입니다. ‘중심은 중심이 아니다’라는 그들의 모토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인식을 일깨우는 외침이었습니다. 지구의 중심은 어디라도 될 수 있듯이, 내가 서 있는 이곳이 중심일 수 있습니다. 빅뱅은 우주 멀리 어딘가에서 벌어진 사건이 아니라, 우주 공간 어디나 다 빅뱅의 출발점이라는 과학적 관찰도 이런 인식의 전환을 뒷받침해 줍니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해체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어디까지 이어져야 하느냐가 문제입니다. 방향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해체 속에서 다시 누군가 묻게 됩니다. “이제 어디서 멈춰야 하지?”라는 질문이 불가피해집니다. 같은 이론이라 할지라도 배경과 상황에 따라 의미와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귤화위지(橘化爲枳)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중국 남쪽의 귤나무를 회수(淮水) 북쪽에 옮겨 심으면 탱자나무가 된다는 뜻입니다. 환경에 따라 사물의 본성마저 변할 수 있음을 비유하는 말이지요. 환경에 따라 사물이 변하듯, 시대적 환경에 따라 사상이나 ‘이즘(-ism, 특정 사상·학설·주의·운동 등을 뜻함)’의 운명과 평가도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는 공산주의 이념의 경우입니다. 우리 시대가 지나온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19세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자본주의의 모순이 커지자, 칼 마르크스는 역사적 유물론을 제시하며 공산주의 사회를 예견했습니다. 그는 헤겔의 비판적 계승자였습니다. 헤겔이 ‘정신’을 역사의 동력으로 보았다면 마르크스는 ‘물질(경제)’을 그 자리에 두었던 것이지요. 그는 자본주의 내부 모순, 곧 갈등이 심해지면 역사적 필연으로 공산주의 사회가 올 것이라 주장했습니다.

그런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즘’으로 이끌어 혁명을 이룬 이는 레닌이었습니다. 현실에서 급하게 추진된 혁명은 무수한 희생자를 낳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혁명을 일으킨 지도자들은 과거 절대왕정 시대의 군주보다 더한 호사와 사치에 젖어들며 새로운 억압 구조를 만들어 냈습니다. 20세기는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두 이념의 치열한 대결장이었지만, 결국 20세기 후반 소련의 해체와 함께 공산주의 국가 체제 실험은 막을 내렸습니다.


그렇지만 혁명적 실천이 실패했다고 해서, 곧바로 마르크스라는 사상가의 통찰 자체가 ‘틀렸다’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자본주의의 문제를 지적한 그의 날카로운 분석은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갖습니다. 문제는 당시 인류가 아직 그 구상(공산사회)을 실현할 만한 생산력과 도덕적 수준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미래에는 그날이 올지라도 분명한 것은 “여기, 지금”은 아니었던 것이지요.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이즘과 사상은 나름의 유토피아를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 궁극적인 평가는 결국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 역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럴듯한 이론이라도 현실 속에서 유익이 없다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공허한 말잔치나 지적 유희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끝없는 해체와 의심을 통해 기존 체계의 허점과 모순을 날카롭게 폭로했습니다. 기존의 모든 이념, 도덕, 가치, 문화를 의심의 칼날 위에 세웠습니다. 하지만 ‘끝없는 해체’ 자체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종종 그 물음의 의미마저 해체해 버립니다. 이런 식이라면 해체라는 방법은 어떤 비판도 허용하지 않는 영원히 유효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결국 건설적인 대안 모색보다는 “상대방의 언어를 해체하는 방식”에만 머무르며 끝없는 논쟁만 남게 되고, 서로의 진심과 입장을 이해하고 조율하기는 더욱 힘들어집니다.

저는 그러한 방법론으로서의 해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해체”를 두고 학문적 논쟁을 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끝없는 해체란 어쩌면 포스트모던 사상 체계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한 주장임을 이해합니다. 그렇지만 한 시대의 사상이나 이념의 평가는 단지 아름다운 ‘말의 향연’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론’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실천’의 결과라는 물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이상은 매력적이어도 현실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저는 묻는 것입니다. 과연 그 끝없는 해체가 ‘지금, 여기’ 우리의 삶에 여전히 유효한가?


초등학교 시절, 미술 시간. 늘 어려운 것은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였습니다. 늘 ‘덜 그리거나’, 종종 ‘너무 많이 그리거나’. 그림을 그릴 때 제가 갖게 되는 특별한 부담감이 있습니다. 어떤 때는 글도 그렇습니다. 이리저리 고치고 수정하다 보면 어느 순간 완전히 방향을 잃고 헤매는 순간이 오기도 합니다. 언제나 끝은 제가 아니라 마감, ‘시간’이 가져다줍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필요했던 ‘시간’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포스트모던적 시각이 요구되는 문제들이 분명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무작정 끝까지 해체만 외치는 길이라면 두렵기도 합니다. ‘지금, 여기’의 맥락을 잃어버리면, 아름다운 결실은 열매 맺지 못하고 맙니다. 많은 경우 그런 ‘이즘’은 역사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끝없는 옳음”이란 무엇보다 그 자체로 반(反)포스트모던적인 것은 아닐까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치를 올린 지도 이제 오랜 시간이 지났습니다. 시대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두 세대가 지났습니다. 그래서 맞이한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요? 잘 살고 있는 게 맞는지 어느덧 묻고 싶습니다. 거리에는 온통 분노하는 자들뿐입니다. 뉴스 듣기도 기사를 읽기도 겁이 납니다. 말 한마디에 죽고 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왜죠?

글의 목적은 포스트모던의 주장과 이론에 대한 반박이 아닙니다. 제가 느끼는 현실에 대한 ‘알람’입니다. ‘지금, 여기’라는 맥락 속에서, 해체와 비판의 칼날을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를 생각합니다. 어쩌면, 멈추는 그곳에서 새로운 길이 펼쳐지리라, 희망을 품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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