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지식은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나누던 ‘이야기’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우리의 먼 조상들은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며 신들의 사랑과 운명을 이야기했고, 거대한 자연의 힘 앞에서 보이지 않는 정령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이야기들은 단순히 심심풀이 유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혼돈스러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고, ‘우리’라는 공동의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최초의 지식이었습니다.
이야기는 흩어져 있던 개인들을 하나의 씨족, 나아가 부족이 되게 했습니다. 세대를 넘어 전해지면서 민족이 되게 했습니다. 어쩌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탄생이 가능했던 것도 생물학적, 진화론적 이해에 더해서 문화 인류학적 이해가 더해져야 하는 것은 아닐까요?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볼 때, 이 공유된 이야기가 현생인류의 ‘문화적 DNA’를 형성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런 주장은 최근의 유전학 연구가 근거가 됩니다. 현대 인류의 유전자 안에는 우리가 홀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네안데르탈인이나 데니소바인 같은 다른 호미닌들과 피를 섞으며 진화해 왔다고 합니다. 막스 플랑크 연구소의 스반테 페보(Svante Pääbo) 소장은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정보를 최초로 해독한 공로로 2022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이 해독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 정보를 현대인의 유전 정보와 비교 분석한 결과, 아프리카인을 제외한 현대인의 유전자 속에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섞여 있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해 냈습니다.
연구에 따르면 아프리카를 제외한 지역의 현대인들은 대략 1-4%의 유전자를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물려받았다고 합니다. 더해서 멜라네시아인이나 호주 원주민 같은 일부 아시아 - 태평양 지역의 사람들에게서는 데니소바인의 DNA가 최대 5%까지 발견된다고 합니다. 당뇨를 유발하는 유전자( SLC16 A11)나 대표적으로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탄생이 다른 생명종과 어떻게 다른지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네안데르탈인과 사피엔스를 다른 종이라고 나눈 건 인간이 만든 범주일 뿐, 실제 자연은 훨씬 연속적이었던 거죠.
어쩌면 그것은 더 강한 주먹이나 큰 뇌가 아니라, 더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공유하는 능력이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더 나은 이야기로 더 큰 집단을 형성하고, 심지어 다른 종족마저 우리의 이야기 속으로 흡수하며 세력을 확장했던 것이 아닐까요? 결국 호모 사피엔스의 진정한 위대함은, 현실을 넘어 보이지 않는 약속과 신화를 믿게 하는 이야기의 힘에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세기말 튀르키예의 남동부 황량한 언덕에서 최소 1만 년이 넘은 유적이 발견되었습니다. 괴베클리 테페(Göbekli Tepe)라 불리는 이 유적은 기존에 알고 있던 인류의 역사에 대한 인식을 근본적으로 흔들었습니다. 그동안 빙하기가 끝나고 대략 1만 년경에 농업혁명이 인류 문명의 시작이었다고 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 이전 수렵채집 경제의 시대에 인류는 수십 톤에 달하는 돌기둥을 쌓고 정교한 동물 조각을 새겨 넣은 경이로운 건축물을 세운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 후 비로소 종교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과 우주에 대한 강력한 ‘이야기’가 먼저 존재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될 수 있습니다. 공유된 이야기가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이 되었고, 거대한 성전을 짓기 위한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게 만들었던 것이라 보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신성한 장소를 중심으로 머물기 위해 농사를 짓고 마을을 이루었을지도 모릅니다.
근래에는 괴베클리 테페보다 더 오래되거나 같은 시대의 유적지에 대한 연구들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쾰티크 테페 (Körtik Tepe), 카라한 테페 (Karahan Tepe)가 대표적입니다. 이 유적들은 농경 이전 시대에도 복합적인 정착, 의례, 공동체 활동이 가능했다는 중요한 증거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이야기는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함께 믿고 함께 행동하게 만드는 ‘슬기’의 원형이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이 구전되던 이야기들은 더욱 정교하고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텍스트(Text)’라 부릅니다. 이는 라틴어 textus에서 유래했습니다. “짜다”, “엮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는 직물이나 조직된 구조를 의미하는 표현이었지만, 문장이란 것도 단어들을 엮어 만든 구조라는 점에서 은유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 라틴어를 거쳐 영어 text로 발전하면서,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적 구조물이라는 뜻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다가 20세기 구조주의 등장 이후 철학적 맥락에서는 인간의 인식과 소통의 구조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오늘날 텍스트의 의미는 신화나 전설 같은 언어적 콘텐츠에 제한되지 않습니다. 암각화, 음악, 춤, 조각, 토템, 문양 등의 모든 의미를 엮어 전달하는 구조물들도 텍스트로 이해합니다. 텍스트는 인간이 의미를 구성하고 소통하는 방식 전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확장된 것이지요.
문자의 발명은 곧 텍스트를 기록하게 했습니다. 초기 텍스트의 기록은 ‘경전(經典)’으로 남았습니다. 성경, 쿠란, 불경과 같은 경전들은 인류 문명의 거대한 기둥이 되었습니다. 경전이 제시하는 세계관은 그 공동체 안에서 절대적인 진리가 되었습니다. 그 안에서 무엇이 선이고 악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고 죽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 주어졌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이야기의 과학적 사실 여부가 아니라, 암묵적 합의이고 정신으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입니다.
과학이 신화의 자리를 대체한 현대 사회에서 이 역할은 헌법으로 대체되었습니다. ‘헌법(憲法)’입니다. 헌법 제1조 1항,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이 문장은 과학적 사실이 아닙니다. 하지만 이 약속된 문장들 위에서, 우리는 법을 만들고, 재판을 하고, 국가를 운영합니다. 한 국가 공동체 안에서 헌법은 그 어떤 과학적 진리보다 강력한 ‘절대적 진리’로 작동합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인류의 문명은 텍스트라는 기반 위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인문학도 중요합니다. 어떤 과학, 어떤 기술을 가졌는가에 못지않게 어떤 음악, 어떤 이야기, 어떤 텍스트를 가졌는가가 공동체, 나아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합니다. 단군 신화, 흥부와 놀부,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 김치를 먹고 아리랑을 부르며 살아온 이들이 곧 대한민국입니다. 식민지의 경험과 오랜 전쟁의 폐허의 위에서 어느 사이 선진국에 반열에 들었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많은 것을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빛이 밝으면 밝은 만큼 그림자도 짙기 마련입니다. 세계는 우리의 이야기에 환호하는데, 정작 우리는 행복할까요? 눈부신 경제 성장과 전 세계를 매료시킨 문화적 성공 이면에서, 우리의 그림자는 어느새 짙어져 있습니다. 얼마 전 독일의 한 공영방송국에서 한국의 인구 감소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그들은 한국 사회가 이룬 놀라운 성공을 조명하면서도, 동시에 '국가 소멸'을 걱정해야 하는 기이한 현실을 분석했습니다.
타인의 시선으로 우리를 돌아보는 것은 때로 아프지만, 가장 정확한 진단이 되기도 합니다. 미래에 대한 불안은 세대를 가리지 않고, 사회적 갈등의 골은 그 어느 때보다 깊어졌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지만, 행복 지수는 늘 바닥을 맴돌고 자살률은 OECD 최고 수준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습니다. 이러한 위기는 단순히 경제나 정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공유할 ‘공동의 이야기’를 잃어버린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20세기를 지나며 인류가 목격했듯이, 세상의 질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유동적입니다. 강력한 이야기는 국경을 넘고, 이념을 녹이며, 개인의 정체성마저 뒤흔들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놀랍지 않은 시대에, 우리는 이야기의 힘을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성찰해야 합니다.
어쩌면 우리는 세계라는 무한경쟁의 현실을 살아내느라, 정작 우리 자신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던 공동의 텍스트가 사라진 자리에, 이제는 서로를 향한 날 선 언어와 각자의 고립된 섬만이 남아있는 듯합니다. 이제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