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정치: 진리가 아닌 선택의 기술

by 결휘

중국의 고사 가운데 '허유세이(許由洗耳)'는 말이 있습니다. ‘허유가 귀를 씻었다’ 라는 의미입니다. 중국 고대 전설에 등장하는 요임금이 나이가 들어 왕위를 물려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마침 허유라는 인물이 지혜롭고 존경받는 인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요임금은 그를 찾아가서 왕위를 물려주려 했습니다. 허유는 못 들을 말을 들었다고 여겨 영수(潁水)라는 강가에서 귀를 씻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친구 소부(巢父)는 허유가 귀를 씻은 물이 더럽다 여겨 자신의 소에게 그 물을 먹이지 않고 상류로 올라가 물을 먹였다는 내용입니다. 이 일화는 세속적인 명예나 이익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청빈(淸貧)한 삶을 추구하는 것이 참된 군자의 도리임을 교훈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동양 전통 사회에서는 정치에 참여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오랫동안 존재해 왔습니다. 과거 유교 문화권에서는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중시하여 일반 백성은 정치보다는 자신의 가정과 생업을 돌보는 데 집중했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는 덕망 있는 군주와 능력 있는 관료가 다스리는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군군신신 부부 자자(君君臣臣父父子子)”라는 공자(孔子)의 말처럼, 각자 자기 신분과 역할에 충실하면 사회 질서는 저절로 유지된다고 믿었기에, 보통 사람이 직접 정치에 나설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한 측면도 있습니다.

특히 잦은 전란과 정치적 혼란을 겪으며 안정을 중시하게 된 문화 속에서, 정치는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위험하고 혼탁한 것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았습니다. 정치는 꺼리는 것, 멀리해야 할 것이라는 정서가 뿌리 깊다 보니, 현대 민주 사회에 이르러서도 정치 혐오나 정치 무관심으로 이어지는 경향을 볼 수 있습니다. 사회가 어려울 때 “정치 얘기는 하지 말자”며 대화를 피하거나, 투표를 해봐야 소용없다고 체념하는 모습이 나타나곤 합니다.


상대적으로 먼저 민주정치의 과정을 경험한 서양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 도시국가부터 정치 참여를 시민의 중요한 덕목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었습니다. 예로써 아테네에서는 시민 남성이라면 누구나 광장(아고라)에 모여 국정을 논의했고, 직접 투표로 법과 정책을 결정했습니다.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고 사적 생활에만 몰두하는 사람을 가리켜 아테네인들은 ‘이디오테스(ἰδιώτης)’, 즉‘사적 인간’이라고 불렀는데, 여기서 오늘날 “바보(idiot)”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그만큼 공동체 일을 돌보지 않는 태도를 어리석게 여겼던 것이지요. 시민으로서 공적 문제에 참여하는 것이 곧 교양 있고 책임 있는 사람의 표징으로 인식되었던 것입니다.


왜 우리는 정치를 그렇게 불편하게 느낄까요? 우선, 정치에는 갈등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정책 하나를 두고도 찬반이 갈리고, 서로 목소리를 높이며 싸우는 모습을 보면 자연히 피하고 싶어집니다. 게다가 정치는 타협의 과정이라 완벽한 결론이 나기 어렵습니다. 모든 사람이 만족할 결정은 드물고, 때로는 누구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이상한 절충안으로 타협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니 답답함을 느끼고 “차라리 관심 끄는 편이 속 편하다”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불편해도 정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인간은 공동체로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선택의 순간들, 해결해야 할 도전들의 연속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정치는 국가 단위의 통치기술을 뜻하지 않습니다. 개인의 삶에도 정치의 기술들이 요구됩니다.


결혼 초기에 아내와 약속을 했습니다. “어떤 결정이든 서로 의논해서 함께 결론을 내리자”라는 것이었지요. 가령 오늘 메뉴는 무엇으로 할지, 청소를 어떻게 할지, 어디를 방문할지 등 모든 사안을 신중하게 상의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면 정말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막상 일상을 살아보니, 당장 눈앞에 닥치는 일들은 의논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고, 어떤 때는 서로 의논할 시간조차 없이 결정해야 하는 순간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버스가 막 도착해서 곧 떠나려 할 때, “이 버스를 탈까, 조금 더 기다릴까?”를 서로 논의하고 합의하기엔 시간이 너무 부족합니다. 저는 조금만 뛰면 얼마든지 탈 수 있을 거 같아서, 뛰자! 하고 버스를 향해 뜁니다. 아내는 다음 차를 타자고 합니다. 머뭇거리는 사이 차는 떠나고 한참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이 뭔가 불편해집니다. 신호등 앞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수시로 벌어집니다. 파란불이 깜빡이기 시작하면 저는 “뛰자!” 하지만, 아내는 거의 “다음번에 건너자”합니다.


정치란 무엇이 옳고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결정들은 애매하고 어렵습니다. 또 다음번에는 어떨지 알지 못합니다. 자연과학이 매력적인 이유는 검증이 가능하고 예측이 가능하고 답을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문학이 인기가 없는 이유는 애매하고 결론도 마땅치 않기 때문이겠지요. 과학이 자연의 답을 찾는 기술이라면 정치는 삶의 답을 찾아가는 기술이라고 이야기해도 될 듯합니다.

인간 사회가 존재하는 한, 크고 작은 집단에서 의사결정은 계속 이루어질 것이고, 거기에는 늘 생각의 다름과 이해관계의 충돌이 따릅니다. 따라서 정치를 피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정치제도와 실수투성이의 정치인들 속에 살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치를 혐오하고 등 돌린다면 더 나은 내일은 기약할 수 없습니다.

정치가 기술이라는 의미는, 기술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라는 은유입니다. 인간이 공동체로 살아가기 위한 기술이기에,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중요합니다. 그렇기에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갖춰야 할 태도는 비판적 사고와 열린 마음입니다. 진영논리에 치우치지 않고 사실을 파악하려는 노력, 그리고 다른 의견에도 귀 기울이는 관용이 중요합니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와 열린 마음이 오늘날 더욱 절실한 이유는, 최근 우리 사회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정치를 단순한 '선과 악의 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를 복잡한 이해관계의 조정이나 현실적인 대안을 찾는 합리적 과정이 아닌, 도덕적 우월성을 앞세운 절대선과 절대악의 성전(聖戰)으로 규정하면 타협의 여지는 완전히 사라집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상대방은 더 이상 토론의 대상이 아닌 척결해야 할 '악(惡)'이 되고, 정치는 결코 끝나지 않는 증오와 투쟁으로 변질됩니다. 극단적인 이분법적 사고는 사회적 갈등을 걷잡을 수 없이 증폭시키고, 합리적인 의사결정 시스템 자체를 마비시키는 심각한 위험을 낳습니다.


완벽한 정답이 없어 답답할 때도 많지만, 정치의 과정에서 공동체는 배우고 발전해갑니다. 때로는 시행착오도 겪겠지만, 우리가 함께 논의하고 선택한 길은 그렇지 않은 길보다 훨씬 더 의미 있고 책임질 가치가 있는 길입니다. 불완전함 속에서 최선을 찾으려는 우리의 정치적 노력이 쌓여서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 것입니다. 결국 옳은 정치 바른 정치란 우리가 서로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느냐에 달려다 할 수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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