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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규민 Mar 25. 2024

분기점, 여러 철도 노선이 함께 존재하는 역.

240206

 집 근처 페컴 라이 역에는 4개의 승강장이 있다. 내가 주로 가는 곳은 1번과 2번. 이런 형태를 '섬식 승강장'이라고 한다며 정남이가 말해주었다. 중간에 승강장의 왼쪽과 오른쪽에 각기 다른 열차가 오는 형태이고, 달스턴 정션과 클래팜 정션을 향하는 두 열차의 간격은 약 2분 정도. 다른 생각을 하다 보면 반대로 가는 열차를 타기 일쑤이다. 하필 두 기차 모두 '정션'을 향한다. 정션이 도대체 뭐길래.




 클래팜 정션에서 달스턴 정션까지의 총시간은 약 40분. 서울에 살 때 자주 타던 8호선이 대충 그랬다. 번화가와 거주지 사이에 존재한 미묘한 교통의 요지. 역 앞에 줄지어 놓인 상점들, 생선과 정육점 냄새, 하루를 빠르게 시작하고 마감하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흐름. 면접을 보러 이곳에 온 첫날, 나는 가락동이 떠오르며 막연하게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여기에 있다. 달라진 게 참 많았지만, 가장 최근의 변화를 꼽자면 빨랫대와 밀폐용기 전면 교체 건이다. 나는 오랜 시간 함께한 친구들에게 단호하고 냉정하게 작별을 고했다. 내 런던 생활을 처음부터 최근까지 함께 했던 내 오랜 깐부들에게.



런던으로 이사 온 직후 산 이케아의 플라스틱 밀폐용기. 오랜 시간을 나와 함께하며 내 남은 음식들을 품어주었고, 우리는 서로 큰 불만 없이 지내는 줄 알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씻어도 카레향이 빠지지 않았다. 이 친구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일을 시킨 것이 아닐까. 이제는 보내주고, 새 유리 용기를 사자.


 그보다 조금 더 연장자로 보이는 빨래 건조대. 파이프가 하나 더 떨어졌다. 접착제로 붙인 부분도 몇 번 쓰고 나니 다시 떨어졌고, 이제는 가용공간이 반 이하.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이 두 친구들에게 한꺼번에 퇴직을 종용했다. 심지어 대용할 친구들을 바로 데려와 버린 후. 연애를 마무리할 때 들었던 "참 정 없다."라는 말이 생각났다. 글쎄, 나는 어떤 사람일까.

 

내가 스마트폰을 상당히 늦게 사게 된 계기였던 아이폰 클래식 5세대. ( 이미지 출처 : 위키피디아 )

 예전에 쓰던 아이폰 클래식에게도 그랬다. 아이폰 터치가 막 나온 무렵, 무겁고 구닥다리라며 내게 맡겨진 그 친구. 1시간을 채 못 버티는 배터리 용량과 점점 무겁게 느껴지는 무게감. 시간이 흘러, 번거로운 과정 없이 스마트폰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된 시절. 나는 나이를 먹어가며 낡아가는 아이팟 클래식에게 안녕을 고했다.


 엄마는 내 물건을 그대로 두었다. 경북 영주에 마련된 새 가족의 집. 2층에 놓인 내 물건들, 20대의 내 세월들이 거기에 있었다. 엄마는 확실히 정이 많은 편이다. 나와는 다르게.


 오늘 집에 돌아오면서 들었던 기적 소리와 함께 보인 보랏빛 하늘이 약간 슬프게 느껴졌다. 그녀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나는 참 정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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