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은 좀체 뭐든 손에 잡히지 않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폰게임하면서 봤다.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싶었기에, 폰게임을 하며 드라마에 곁눈질하며 보았다.
사실 다 보진 않았다.
그래도 반쯤은 봤다.
제주도 하면, 그냥 난 제주도가 좋다. 언젠가 한 해는 제주도에 살고 싶을 정도.
사실 좋은 기억도 많다.
최장기간 혼자 여행 했던 때는 제주도에 올레길을 절반 정도 걸었을 때였다.
대학원을 휴학하고 마음이 갈피를 못 잡을 때 한 번 부모님께 부탁해서 가보았다.
사실 엄마는 혼자는 못 보낸다고 해서, 친구랑 간다고 뻥치고 허락 받았었다.
더 오래 전에 제주도에 대한 기억으로는,
학생회장 시절, 민속 조사를 겸한 학과 답사를 갈 때, 괜히 한 번 호기롭게,
한 번 제주도로 가봅시다! 했다가 좌초된 적이 있었다.
그래도 대학원 선배 한 명이랑 사전답사는 가고, 혼자 사전 조사까지도 이리저리 다 했었다.
재미난 기억은 많다.
https://www.yna.co.kr/view/AKR20240809060000056
이 기사의 첫번째 사진이 내가 사전 답사를 갔던 마을 송당리다.
송당리 이장님, 꿩칼국수 사주셨는데... 잘 계시려나.
그래서 민속의 측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긴 했다.
제주도에서 무당은 전통적으로 남자가 더 많다고 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저 기사의 전통 마을제도 남자 무당이 주관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지만, 한국 미디어에서 무당이 여자인 것은 디폴트가 된지 오래!
뭐, 크게 지적할 부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럼 본격적으로 리뷰 시작
1. 폭력이 배재된 방식의 배경에 대한 회상
나름 흥미로운 부분은 80년대 대학가를 다루면서도 운동권 청년 캐릭터가 하나도 안 나온다는 것!
이는 86세대들의 민주화 서사가 어느 정도로 헤게모니를 상실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헤게모니 상실 이전의 2016년에 나온 '응답하라 1988'의 경우 더 가벼운 분위기의 드라마임에도,
운동권 캐릭터가 나온다.
금명이는 대학에 다니지만 운동권에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운동권에 연관 있는 친구가 없다.
그저 영화 동아리에 속해서 영화 동아리 친구와 이성교제를 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알기론 80년대 동아리라는 게...
동아리 이름 걸고 운동권 단체인 경우가 태반이라 했던 것 같은데...
난 문학동아리 44기인가 그런데,
그 동아리 10기 이하는 사실 기록이 없다고 했던 것 같다...
원래 운동하는 지하써클로 시작했기 때문...
80년대에 학생회관을 얻었지만, 00년대 초반까지는 계속 운동권풍이었다고...
영화 1987에는 이한열 열사를 모티프로 한 캐릭터가 나오는데,
이한열 열사의 만화동아리도 사실은 명분상 만화동아리였다고 들었던 듯하다.
어찌 되었건, 그 시대적 배경에 있는 폭력을 배제한다는 게 내가 서두로 던지려고 했던 바.
어느 정도냐 하면, 애순이보다 한 세대 위 캐릭텨는 4.3을 직접적으로 겪었을 세대임에도.
그 세대에게 그러한 회상은 하나도 없다.
4.3이란 게 제주도에서 얼마나 큰 사건이었는지, 사실 잘 몰랐었다.
그런데 제주도 사전답사를 갔다가 당시 80대쯤 되시는 할머니들과도 대화했는데,
4.3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자 한참을 이야기를 하셨다.
사실 어떤 이야기를 하시는지 잘 알아듣지 못했다.
표준 교육 받기 전 세대의 제주어는 거의 알아듣기 힘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 사건에 대한 한이나, 그때의 고생한 것에 대한 울분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정도로... 4.3은 제주도에서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처럼 '폭싹 속았수다'의 회상 방식에는 폭력이 배제된 방식이다.
그런데, 폭력의 배제는 단순히 지역적 배경, 시대적 배경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2. 안온한, 폭력이 배제된 방식의 가족에 대한 회상
이 드라마의 핵심 소재는 가족의 연대기다.
그런데 그 가족의 연대기도 전체적으로 폭력의 배제를 통한 방식으로 회상된다.
그 전의 대가족에는 어느 정도의 폭력성이 결부되어 있는 요소들이 회상되지만,
애순의 가족은 내내 어떠한 폭력도 없이, 안온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관식과 애순은 부부 싸움이라곤 일절 없는 잉꼬부부이며,
베이비부머 부모답지 않게, 아이를 정말 말로만, 그것도 언성을 거의 높이지 않으며 가르치려고 한다.
그러한 가족의 회상 방식은 결국,
폭력이 배제된 방식의 가족에 대한 회상이라 하겠다.
일각에서 이 드라마를 두고, 가족주의라고 비판하는 논거가 되기도 하는데,
그게 가족주의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그런데, 어찌 되었건 가족에 대한 판타지를 소비한다는 것은 맞다.
그리고 금명의 출세를 위해 부부가 자신의 삶을 희생하는 것 또한,
지나치게 미화된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후회, 아니면 버린 것에 대한 미련, 그런 것은 일절 없는 것으로 그려진다.
난, 사실 그러한 분위기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있는 편이다.
난 내 부모님이 나를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한 편에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떠한 미움도, 원망도 없다.
그러나, 두 분이 하신 일 중에 나에게 상처가 되었던 부분도 분명히 많다.
작년에는 내가 처음으로 끄적거렸던 소설(생존의 발명)을 최종 형태로 만들었다.
그 소설은 내가 대학원을 휴학하고, 복학한 후까지도
계속 되는 인생에 대한 헛헛함과, 무상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를 고민할 때
엄청 공을 들였던 소설이었다.
그런데 그 소설의 최종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부모님이 내 마음 속에 남긴 상처의 일부를 극화해야 했다.
그 상처에 대한 이해는 한참이 걸렸는데,
사실, 그런 게 있다는 걸 알면서도 받아들이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가족이 정서적인 모든 걸 해결해줄 수 있는 공동체는 전혀 아니다.
인간은 완벽할 수 없으며, 완벽하지 못하기에 줄 수 있는 건 한계가 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에게 보고 싶지 않은 부분이 있으며,
그 부분은 내가 버리게 된 나의 일부분이 되기도 한다.
또한 인간이 자녀 때문에 무언가를 포기했다면,
과연 그것에 대한 후회가 전혀 없을 수 있을까?
아까 말한 내 슬럼프 이후 깨달은 건
난 내가 꼴리는 대로 살아야지,
남들 생각에 맞추어 살면 나는 너무 힘들어하는 스타일이라는 것.
그래서 생각을 많이 하고, 쓰는 것을 해보려는 삶을 선택했다.
미련이 없느냐?
후회가 없느냐?
전혀 아니다. 후회와 미련은 인간이 버리지 못하는 거다.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 내 모습이 눈 앞에 어른거릴 때도 많다.
별 수 없다. 그냥 내가 모든 걸 가질 수 없음을 받아들일 수밖에
삶 자체가 폭력적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삶을 살려면, 어찌 되었건 무언가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그리고 선택하지 못하는 요소를 버려야 한다.
관계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해준다는 것은, 다른 어떤 것을 포기하고 버렸다는 것이다.
양육한다는 것은 아이의 어떤 부분이 드러나지 못하게 억누르는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는 그런 게 전혀 없다.
'하고 싶은 거 다 해!' '수 틀리면 빠꾸! 아빠한테 다시 오면 돼!'가 디폴트인 가족이다.
그리고 그걸 위해 과감히 모든 걸 희생한다.
우리 부모님도 나를 위해 희생한 것은 많다.
그러나 그 희생을 통해서, 내가 자신들 대신에 무언가를 이룩해주었으면,
하는 마음을 은근히 많이 내비치셨다.
난, 그게, 오히려 인간적인 것이라고 본다.
희생했는데, 무언가를 내어주었는데, 내 마음에 빈 공간, 채워야 할 공간이 생기지 않는가?
그러면 공간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드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이 부모에게는 그런 게 전혀 없다.
한국 사회에 가득한 가족에 대한 판타지가
계속 소비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드라마를 소비하는 시청자층의 상당수가 자신이 그러한 완벽한 부모였으면,
하는 중장년층이라서...?
사실 잘 모르겠다.
3. 얼룽뚱땅 처리되는 결국은 좋았던 관계
사실 이 드라마를 보면서 걸렸던 부분이 이 부분이다.
이 드라마는 가족에 대해서 이상화하는데,
그 이상화된 가족의 가족들도 있을 것 아닌가?
가족이 이상적 존재라는 건, 가족의 가족들도 좋은 사람이여야 해결될텐데...
이 드라마에서 애순에게 가장 악연일 사람은
누가 뭐래도 새아빠의 후처다.
애순이가 결국 새아빠네 식구를 다 먹이고 살림하고 다 했는데...
그래서 대학에 진학시켜줄줄 알았는데...
갑자기 나타난 후처!
그리고 애순이에게 이것저것, 해주기는 힘들다고 대놓고 말한다.
얼마나 악연인가?
그런데 이 인연도 결국에는 가족의 가족인 관계로인지..
몰라, 어쨌든 얼릉뚱땅 좋은 사람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애순의 할머니.
종손만 대놓고 좋아하던 애순의 할머니는
애순이 다 크고 나니까 애순의 집에 배 한 척을 살 돈을 거뜬히 내어놓으신다.
이처럼 얼릉뚱땅 넘어간다.
가족에게 희생한 몫은 다 언젠간 돌려받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리고, 가족의 가족은 다 알고보면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 참...
알고보면 좋은 사람,
더 알고나면 좋은 척만 한 사람인 경우가 더 많더라...
그런데 이 드라마는 정말 한꺼풀 베끼고 나면
다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그렇게 얼릉뚱땅 갈등이 해결된다.
그렇게 도시화 이전의 마을 공동체, 친족 공동체는 다 미화되어버린다.
참 적응 안 되는 전개...
4. 뜻은 모르겠지만, 모두들 '폭싹 속았수다'
아직 드라마 결말을 안 봤다.
그리고 볼 생각이 없다.
그러나, 어쨌든, 모두들
사는 게 고생고생이다.
편한 곳이 없고, 편한 일이 없다.
그 드라마는 나를 위해 힘 써주신 부모님,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뭐 이거겠지만...
이 글 읽는 모든 사람들 전부, 폭싹 속았수다.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