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정 담화문
우리는 한국에서 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든, 어떤 정책이 수립되든 개의치 않았고 따라서 지금껏 그에 대한 평가자체를 일체 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울에서 어떤 정책이 수립되고 어떤 제안이 나오든 흥미가 없으며 한국과 마주앉을 일도, 론의할 문제도 없다는 공식립장을 다시금 명백히 밝힌다.
조한관계는 동족이라는 개념의 시간대를 이미 완전히 되돌릴수 없게 벗어났다.
7월 28일 북한의 김여정이 발표한 담화문은 처음 들었을 때는 새 정부 출범 직후 북한이 관례적으로 보내는 적대적 메시지로 여겼다. 그러나 담화의 내용을 면밀히 들어보니, 훨씬 더 중요한 문제다고 느꼈다. 지금의 메시지는 적대적이지 않다. 이번 담화에서 주목할 점은 북한이 이제 남한을 민족이라는 감성적 틀에서 벗어나 철저히 독립된 두 개의 국가로 간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단순한 적대감을 넘어 '무관심'과 '무시'라는 전략적 태도를 담고 있다.
담화가 북한의 대표적인 내부 매체인 노동신문에 게재되지 않고, 대신 대외 채널로만 전달된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북한 내부에서는 여전히 민족 수령 이데올로기의 필요성 때문에 공개적인 두 국가론 채택이 쉽지 않다는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북한이 외부에만이라도 두 국가론을 명시적으로 밝힌 것은 남한과의 관계를 철저히 국제관계의 차원으로 전환하려는 명확한 의도를 담고 있다.
이러한 북한의 전략 변화는 한국과의 대화에 대한 관심을 사실상 접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점은 문재인 정부가 추진했던 ‘한반도 운전자론’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지점이다. 당시 남북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 등으로 한국이 문제 해결의 주체로 부상한 듯 보였지만, 하노이 회담 결렬 이후 북한은 점점 한국을 미국의 ‘대리자’ 정도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후 2019~2020년 사이에 북한은 한국을 패싱하고 미국과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다가 지난 정부부터 남북관계가 적대적 두 국가라는 말을 한 것이다. 그러나, 대외에서 ‘두 국가’ 구도를 굳히는 순간, 한국을 패싱하고 북한과 미국의 대화는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문재인 정부의 ‘운전자론’은 한반도 문제를 한국이 충분히 관리할 수 있는 내부 문제로 설정했지만, 북핵 문제는 사실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힌 국제전략의 핵심 이슈였다. 한국 정부는 특히 북핵 문제에서 전략적 이해를 공유하는 일본 등 핵심 국가들과 적극적인 외교적 협력을 추진하지 않고, 남북미 3자 중심의 좁은 틀에만 의존했다. 일본과의 협력 배제는 큰 오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북핵 문제에 대해 안보적인 위협을 공유하는 친미 국가임에도 공조를 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역사 문제를 통한 적대적 대립만을 강화한 느낌이 있었다.
이 사이 북한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화 노선을 강화하고, 러시아를 전략적 카드로 활용하며 외교의 축을 외부로 옮겼다. 그 결과, 북한의 입장에서 한국은 북핵 협상의 주체에서 오히려 방해 요소로 전락하는 역설적인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국은 왜 이러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까? 국제 문제로 공론화하기 위한 설계보다 민족의 일원으로써 한반도 내부 중재에 머무른 것이 문제가 아니었을까?
문재인 정부는 북한 문제를 철저히 민족적이고 감성적인 시각으로만 접근했다. 이로 인해 국제적으로 협력 가능한 국가들과의 관계가 약화되었다. 예컨대 북한이 단거리 미사일 도발, 개성 남북 연락사무소 폭파, 서해 NLL 침범 등 명백한 도발 행위를 감행했을 때도 한국 정부는 “우발적일 가능성이 있다”거나 “남북 신뢰 유지가 우선이다”라는 식의 축소된 대응을 취했다. 이러한 태도는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외교 신뢰도를 떨어뜨렸고, 결과적으로 한국과 협력할 수 있는 국제 파트너들이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남북미 중심의 제한된 외교 접근은 EU, 국제원자력기구(IAEA), 핵확산금지조약(NPT) 등 다자외교 채널을 통한 북한 압박의 가능성도 저하시켰다. 북한 핵 문제를 국제적 의제로 설정하고, 한국의 안보적 위협을 국제사회가 공유하게 하는 대신, 민족적이고 감정적인 담론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현재의 상황을 볼 때 북한 문제는 점점 미국과 북한의 양자 협상 문제로 축소될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자국 본토를 위협할 수 있는 ICBM 제거에 집중할 뿐, 북한의 핵 보유 자체는 사실상 용인할 가능성도 있다. 이미 이스라엘, 파키스탄, 인도의 사례처럼 미국이 일부 국가의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한 전례가 있다. 따라서 한국이 계속해서 한반도 내부, 민족 내부적 관점에서만 접근한다면 북핵 문제 해결 논의에서 철저히 소외될 위험이 크다.
현 정부가 정동영 장관을 통일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민주당의 기존 통일 및 대북정책 노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겠다는 신호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노선이 유지된다면 한국은 북미 협상에서 다시 한번 철저히 배제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제는 북핵 문제를 국제적 관심사로 확고히 환기시키기 위한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외교 전략 전환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 한국과 확실한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일본과 함께 공동성명 발표, 북핵 관련 국제적인 관심 환기 등 북핵 문제가 북한과 미국과의 대화로 국한시키지 않을 노력이 필요하다. 이 같은 적극적 외교 노력이 없다면, 북한의 핵 보유가 국제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용인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