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는 삶을 선택한 업보에 대하여
한동안 누워 있었다. 몸살이라는 핑계가 있었다. 일을 나갈 수 없으니 누워 있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핑계가 사라졌는데도 일어나지 않았다. 침대가 몸을 붙잡는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눌려 있는 기분이었다.
누워 있으면서 생각했다. 왜 이렇게 무기력할까. 답은 바로 나왔다. 글을 쓰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다. 그 사실이 나의 활력을 앗아갔다. 내가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단순했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있다는 증거. 통계라는 작은 숫자가 나를 지탱했다. 그 숫자만으로도 나는 살아 있다는 감각을 유지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숫자가 불편해졌다. 오르내림이 하나의 시선처럼 느껴졌다. 아니, 정확히는 집요한 독자 하나로 압축되었다. 내 글을 전부 읽는 단 한 사람. 그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추측. 그리고 그랬으면 좋겠다는 바람. 그 감정이 나를 괴롭혔다. 아... 그는 왜 나에게 한 마디도 걸지 않을까? 한 번은 그에게 편지까지 썼다. 오지 말아달라고. 그러나 정작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맞을 가능성이 거의 없었다.
지난달에는 묘한 감각이 남았다. 누군가 내 글을 읽고 있는데 반응이 없다는 것. 읽으면서도 침묵한다. 읽는다는 행위가 무언가를 빼앗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쓴 글들이 공중에서 잡히지만, 어디에도 부딪히지 않고 사라지는 듯했다.
그래서 자꾸 묻게 된다. 왜 읽는 거지.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재미있다거나, 이런 이야기를 더 해달라거나, 단 한마디라도 남길 수 있지 않은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읽기만 한다면, 그건 관심일까 무심일까. 아니면 내가 만들어낸 환영을 끝내 지워주지 않는 잔혹한 방식일까.
이번에 글을 모두 숨기고 다시 꺼내는 과정에서, 지금 읽고 있는 건 단 한 사람이라는 심증이 더 굳어졌다. 글을 다시 공개했는데도 며칠 동안 조회수는 0이었다. 그 한 사람이 발견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는 뜻. 그러나 여전히 그것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생각 끝에 결론을 내렸다. 무기력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나는 독자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감사하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내 생각을 좋아해 다시 찾아올 정도의 사람이라면 감사할 뿐이다. 뭔가 읽히고도 돌려받지 않은 느낌이 있다면 쓰는 삶을 선택한 내 업보일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