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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준경 Mar 30. 2024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사회에서 가능한 두 개의 선택지

영화 파묘와 댓글부대로 본 2024년의 대한민국

영화의 현재학은 영화의 내용을 통하여 현재를 탐구하고자 하는 콘텐츠로 영화 내용 전반을 담아내고 있으며, 스포일러가 싫으신 분들은 읽지 않기를 권장드립니다.


1인 미디어 시대의 도래와 함께 무엇이 현실의 서사이고, 무엇이 가상의 서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가장 단순한 예로는 인터넷에 노인들이 주로 속아버리곤 하는 가짜 연예계 뉴스가 있을 것이다. 가수 김종민 씨와 신지 씨가 결혼을 발표한다던지, 아니면 배우 박근형 씨가 사망한다던지. 이러한 가짜 뉴스의 형태는 대중들이 TV를 보면서 상상했던 어떤 것을 교묘하게 편집하여 그것을 사실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이다.


그다음 예로는 주로 40~60대가 접하게 되는 정치 관련 가짜 뉴스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변호사, 회계사, 세무사, 금융 전문가, 의사, 컴퓨터 분야 전문가 등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은 어떤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의 서사를 완성시켜 주는 어떤 것은 자신과 다른 도덕적 관념을 가지고 있기에 용납하기 어려운 자신과는 반대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들이 그 세계에서는 악당이 된다. 어린 시절 안보의 위협에 떨어야 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북한의 사이버 해킹단과 이에 호응하는 국내의 간첩이며, 젊은 시절 서슬 퍼런 독재로 인하여 두려움에 떨었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검찰과 국정원이다.


스스로 1인 미디어 리터러시가 어느 정도 있다고 생각하는 2030은 이러한 가상의 서사를 구별할 수 있는가? 내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 인터넷 활동을 많이 하는 이들에게서 중요한 일들을 살펴보면 종종 이상한 일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작년에 그들의 세계에서는 장사의 신 유니버스까지 만들어진 장사의 신 사건이 있다.


장사의 신은 유튜버 은현장 씨로 과거 후라이드 참 잘하는 집 브랜드를 론칭하여, 이를 성장시키고 성공적으로 엑시트 한 경험이 있다. 은현장 씨는 이러한 자신의 성공 노하우를 바탕으로 백종원 씨가 TV에서 하는 골목식당 모델과 자신의 자영업 성공담을 결합하는 유튜브 채널을 설립하였다.


가끔 유튜브 쇼츠에 떠서 보게 되었던 그의 행태는 솔직히 우리 세대의 감성에는 전혀 맞지 않았다. 우선 백종원 씨와는 달리 컨설팅 대상을 상대하면서 전혀 상대를 존중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행동들을 보였다. 백종원 씨가 TV와 유튜브 세계 모두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상대가 몇 살이고, 상대가 운영하는 식당의 규모가 어느 정도이건 상대를 우선 한 명의 개인이자 한 사업의 사업주로 인정해 주고 이에 알맞게 사람을 상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은현장 씨의 콘텐츠에는 그러한 면모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아마 자영업 노하우에 관한 접근이 필요했던 4050들의 세계에서는 무언가를 알려주러 온 사람으로서 그렇게까지 무례하게 행동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은현장 씨는 점차 채널이 성장해 나감에 따라 자신의 성공을 어느 정도 과장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부 2030세대의 반감을 샀다. 은현장 씨와 이를 제대로 저격하지 않는 저격수 유튜버들(일명 렉카 유튜버), 그리고 그에게 치킨 프랜차이즈를 사준 기업과 몇몇 금융인들까지 이어 붙이면서 점차 이상한 세계관을 만들어냈다. 일명 장사의 신 유니버스. 이에 저격수 유튜버들은 자신들은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며 그것을 피하기 위해 점점 더 큰 유니버스를 만들어서 정치인들, 조폭까지 엮여있는 하나의 음모론 모델까지도 만들어 약 20분가량의 유튜브를 5개를 만들어서 올리기도 했다. 듣고 있으면 전혀 현실감각이라곤 없음을 알 수 있다. 연예뒤통령 이진호 씨의 영상과 은현장 씨의 해명 영상 정도만 봐도 그들이 만든 세계관과 음모론 모델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나무위키에 "장사의 신 유니버스"라는 말을 쳐도 "장사의 신/논란 및 사건사고" 항목에서 "가짜 성공신화 및 주가조작 연루 의혹" 문단으로 넘어가며, 그다음 문단에는 은현장의 해명들에 대해 상세히 적어놓았다.


2024년의 한국 사회는 이렇게 모두들 어느 정도는 가상의 서사를 접하고, 가상의 서사를 즐기며 살아간다. 또한 가상의 존재를 즐기기도 한다. 펭수와 같이 가상의 캐릭터에게 인격이 부여되어 하나의 엔터테이너로 인정받으며 미디어 전반에 등장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오래된 일이다.


이렇듯 우리는 이제 가상의 서사, 가상의 존재가 현실과 뒤섞여 살아가는 사회를 살게 되었다. 그리고 파묘와 댓글부대가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상에서 어떻게 진실을 파악할 것인가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해결책이라고 생각한다. 파묘와 댓글부대는 모두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계를 묘사한다. 그러나 둘은 그 세계에서 진실을 찾기 위하여 전혀 다른 두 가지 해결 방안을 선택한다.


첫 번째, 파묘는 진실을 찾아내기 위해 팩트를 발굴하고자 한다. 파묘가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은 땅 아래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를 발견하는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쇠말뚝이라는 한국인의 내면세계에서 오래된 믿음 하나를 꺼내온다. 쇠말뚝은 일제가 우리에게 남긴 흔적이다. 즉, 파묘는 진실을 찾기 위하여 근저에 있는 변하지 않는 팩트를 찾는 방식을 말한다. 즉, 일제 강점기가 한반도에 존재했다는 팩트가 우리 사회의 진실을 이해하기 위한 발판이며, 어느 정도 제국주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조선의 문화를 연구했던 무라야마 지준이 존재했다는 팩트가 우리 문화가 오독되어 온 이유를 알 수 있는 진실이다.


둘째, 댓글부대는 어떤 거짓말이 통용 가능한지가 오히려 그 세상의 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도구라고 말해주고 있다. 댓글부대 팀 알렙은 자신들의 거짓말을 정당화하기 위해 대충 이런 말을 주고받는다. (지금 현재는 영화관에 걸려 있는 상태이기에 영화를 보면서 타이핑할 수가 없다. 향후에 정확한 워딩으로 수정 예정) "원래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은 완벽한 거짓말이 아니다.", "진실에 거짓을 조금 섞은 것일 뿐이다.", "거짓이 조금 섞인 진실이 오히려 진짜 같다." 즉, 팀 알렙이 뿌린 거짓말이 널리 퍼지고 믿어지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이 사회의 진실을 담아내고 있는 거짓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사회를 구성하는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팩트가 전혀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이 사회가 구성된 방식에 대한 진실은 동시대인들의 마음을 건드리게 하는 거짓말이 무엇인지를 통하여 오히려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 두 가지 모두 현명한 선택일 수 있으며, 나는 어떤 것이 더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어떠한 방향성을 선호하는지를 말할 수는 있을 것 같다.


파묘의 경우를 살펴보자. 파묘라는 영화의 서사의 핵심에는 일본 제국이 한반도를 강제점령한 팩트가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시기 일본은 어느 정도 제국주의적인 의도를 두고 조선의 문화를 연구하였으며, 그것은 무라야마 지준으로 대표되는 일본인 민속학자 집단이다.


그러나 과거에 민속학을 공부했던 이력과, 역사에 관심이 많은 개인적인 관심사들로 인해 영화를 보며 저 두 가지 팩트 이외에 과장된 팩트들로 인하여 개인적으로는 심사가 뒤틀리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우선, 할아버지는 죽은 지 100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1924년 이전에 사망한 할아버지이다. 그런데 손자에게 빙의되었을 때에는 조선인 징병을 독려하는 말을 한다.


일본 제국은 식민지 사람들을 믿지 않았기에 자국의 군인으로는 제한적으로만 활용하고자 했다. 그렇기에 조선인 징병을 독려한 것은 1930년대 후반의 일이다. 이러한 흐름은 조선의 식민지 역사를 이해하는 데에 있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며, 1919년 이후 문화통치를 시도했던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난관에 부딪히자 식민지를 전쟁 기지로 바꾸기 시작한 과정에서 중요한 사건이다. 따라서 한국사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 제작진에 포함이 되어있었다면, 이것은 알고도 그런 것이며 다분히 의도적인 오류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의도적 오류를 통하여 일본의 식민통치체제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또한 무덤에서 나온 사무라이는 화림을 상대하며 얼굴에 그려진 금강경 문구들을 보고는 금강경을 외운 지 이미 500년도 더 넘었다고 말하였다. 이후 사무라이는 자신이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죽었다고 말한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1600년에 벌어진 전투이며, 영화 개봉일 기준으로는 425년 정도 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것 또한 다분히 의도적인 오류로 500년도 더 넘었다는 말을 통하여 일본이라는 국가의 괴이함을 더 강조하려고 한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 전반에 가장 근본적인 악당 무라야마 지준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는 무라야마 준지를 살펴보자. 무라야마 준지가 일본의 음양사로 식민지 조선의 정기를 끊기 위하여 일본의 정령을 태백산맥의 지기를 끊어버릴 수 있는 곳에 박아놓아 버린다. 이는 일본 제국이 강제점령기 시기에 주입하려 했던 식민지 근대성을 상징한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과연 무라야마 지준이 한국의 식민지 근대성을 이식한 사람으로 상징의 대상으로 만들어내야 할 만큼 가장 앞장서서 한국에 식민지적 근대성의 이입하려 한 사람인가 질문을 던져봐야 한다. 이러한 방식의 식민지적 근대성에 대한 이해는 제1세계의 논의를 그냥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는 경향성밖에 보이지 않는다. 일본은 일본 국가 자체가 식민지적 근대성으로 작동하던 국가이다. 비록, 여러 지정학적 이점을 통하여 국가 자체가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았지만, 일본이란 국가가 근대성의 수입하는 방식은 자신의 문화를 한없이 얕잡아보고 무비판적으로 서구를 숭상하는 자발적인 방식의 식민지적 근대성을 보이고 있다. 그렇기에 무라야마 지준과 같은 일본의 민속학자를 한국에 식민지적 근대성을 이입한 주체로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민속조사를 이리저리 따라다니면서 놀랐던 것은 한국에서 자국의 문화를 마냥 미신으로 치부하거나 근절되어야 할 대상으로 치부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이 독자적인 근대화에 앞장섰던 1960년대 무렵부터였던 면이 강하다는 점이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지방자치단체에서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끊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오히려 쉽게 예산을 타내거나 문화행사 유치에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행정용 언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즉, 일본의 민속학자들은 그동안의 식민지적 근대성으로 인하여 한국문화를 몰이해하게 되어온 데에는 큰 관련이 없는 집단일 수 있다.


대학 시절 학과의 담당 교수 중 한 분은 지금은 국립민속박물관장을 역임하고 계시는 김종대 교수였다. 김종대 교수는 당시 민간신앙론에서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치기도 했다. 무라야마 지준을 우리가 연구를 하면서 계속 어느 정도 참고해야 하는 것은 참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지만, 우리가 한국의 민간신앙의 분류법을 가장 잘 발전시킨 것은 무라야마 지준이며, 그 이후 나온 분류법들은 다 무라야마 지준의 분류법에 몇 가지 생각을 더한 것일 뿐이라고.


무라야마 지준이 그렇게 한국의 민간신앙의 분류에 계속 참고되는 이후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식민지 문화였음에도 근대성과 미개로 구분하여 완전히 무시하지는 않는 방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고자 한 그의 이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음의 그의 초기 연구라고 할 수 있는 "조선의 풍수"의 한 대목이다.


표면적인 문화 현상만을 가지고 한국 문화를 운운하는 많은 사람들, 소위 새 시대 사람들 가운데는 구시대의 천한 풍습이며 문맹자들 사이에서만 지지된 미신이라 하여, 이것을 한국 문화의 하나로 추가하기조차 꺼리는 사람이 있다. 비교적 진지한 문화연구가도 이것이 예로부터 내려오는 풍습이며, 민도가 낮은 자들에 의해 형성된 문화라는 이유로 그다지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오랫동안 널리 지지되어 온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다름 아닌 가장 근본적인 생활 요구에 따른 것이며, 가장 직접적인 생활 이상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풍수는 한반도에서 생활을 영위해 온 사람들의 생활상의 이상, 즉 어떻게 하면 보다 좋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까 하는 사상과 노력을 여실히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가상과 현실이 뒤섞인 세상에서 팩트를 찾아서 진실을 구성하고자 하는 일은, 오히려 한 두 가지의 팩트를 과장하여 다른 팩트를 왜곡시켜 버리는 일을 만들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민속학을 공부했던 입장에서, 민속학자였던 무라야마 지준을 악당으로 만든 것이 이 영화를 보면서 심사가 뒤틀리게 만드는 주요한 원흉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방식은 오히려 댓글부대의 방식이다. 이 사회에 어떠한 거짓말이 통용되는지가 오히려 이 사회의 진실을 알려준다는 것이다. 거짓말이 통하는 것이 어떤 사회를 어떻게 알려준다는 것인가 하지만, 모든 종류의 소설, 영화, 만화는 다 애초에 거짓말이다.


미생의 장그래를 아시는가? 장그래라는 거짓말로 인하여 사회는 비정규직의 처우 문제 개선이 공론의 테이블로 올라가기도 했고, 장그래 이름을 딴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이것은 한국만의 신파 감성 때문에 벌어진 것이 아니다. 미국의 남북전쟁은 여러 정치적 사건에 의하여 발발하였지만, 북부에 사는 많은 미국인들이 남북전쟁이 정당하다고 느낀 것은 당시 해리엇 비처 스토가 쓴 소설 톰 아저씨의 오두막 때문이었다고 한다.


미학의 시작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이의 차이에서 비롯되었다. 플라톤은 진정한 실재인 이데아가 있고, 이데아의 모방인 현실이 있다고 보았다. 현실을 모방하여 세계를 만들어내는 예술 행위는 이데아의 모방에 대한 모방이며, 근절되어야 할 행태라고 플라톤은 보았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은 인간의 본성이며, 현실을 잘 모방하여 만든 예술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이점은 카타르시스를 느낌으로써 영혼을 정화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다.


미학은 이러한 관점에서 예술의 이점을 점차 확대히여 해석해 온 역사이기도 하다. 멘부커 상의 영광이 빛나는 소설가 한강이 강조하는 것은 추체험이다. 추체험이란 다른 사람의 체험을 자기 체험처럼 느끼게 되는 경험이다.


사회에서 통용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거짓말들은 이렇게 다른 사람이 체험하고 있는 현실을 경험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러므로 가상의 것이 팩트에 어긋난다고 무조건 배척할 것은 아니며, 그렇지만 그것을 이유로 특정한 사람을 비판하고자 할 때는 팩트에 근거하여 비판하여야 한다. 그것이 현실과 가상이 뒤섞인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며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자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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