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라 톺아보기 1 - 아노라와 이반의 관계
무언가를 거래하는 관계는 매끄러워야 한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당신이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를 한 잔 산다. 카페 사장님이 매일 아침 커피를 주며, "이거 커피가 원두가 워낙에 좋은 거라서 한 잔에 7천 원은 받아야 하는 건데, 5천 원이면 손님이 진짜 고마워해야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아니면 "손님, 어제는 저쪽 가게에서 커피를 사시더라고요, 서운했어요!"라고 말한다면? 그 카페는 부담스러워서 다신 안 가고 싶을 것 같다.
거래하는 관계의 핵심적인 가정은 등가성이다. 내가 사기로 한 커피가 5천 원이라고 서로 합의를 하였다면, 그 커피에 5천 원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가정하면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거래의 관계가 미묘하다. 반면에 애정에 기반한 관계는 일반적으로 그러한 등가성이 작동하지 않는 관계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커피를 대접받았다는 이유로 그에 상응하는 돈을 내밀면, 가족에게 정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가족이 맛있는 원두가 들어왔다며 커피를 내려준다고 하면, 고맙다고 말하고 대신에 설거지를 하든지, 아니면 해외출장에 다녀올 때 선물을 사 오는 것이 일반적인 행동이다.
가족과의 관계, 혹은 친구와의 관계처럼 일상에서 애정을 나누는 관계의 핵심적인 가정은 등가성이 아니라 유사성이다. 즉, 상대가 나에게 정성을 쏟은 정도로 나도 상대에게 정성을 쏟아주기를 요구받는다. 그러나 모두가 알듯이 정성은 측량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가끔씩 일상적으로 부딪치기도 한다. 연인 간에 사랑싸움의 절반 정도는 풀어보면, "왜 내가 쏟은 정성만큼 너는 나에게 정성을 쏟지 않느냐", 혹은 "왜 너는 내 정성 몰라주느냐?"가 아닐까? 즉, 정성은 측정이 불가능하기에 등가적으로 교환되지도 않으며, 그렇기에 각자가 자신이 표현한 정성에 알아주거나, 사실은 알아주기 싫어서 각자의 전략을 통해 일상을 짜나간다. 상대의 정성에 반응하기 싫거나, 그것이 힘겨운 사람들은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반응하기도 한다. 때론 상대가 나의 정성을 알아줬으면 좋겠는 사람들은 계속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말하며 상대의 곁에 있어보기도 한다.
영화 아노라에서 아노라는 일상의 정을 나누는 관계와 거래에서의 관계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노라는 스트립클럽에서 일하는 댄서이며, 간혹 손님과 성매매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손님으로 맞은 러시아 재벌 2세 이반과 성매매를 갖다가, 아예 아노라의 일주일을 이반이 통으로 사기도 했다. 이 관계는 일상의 정을 나누는 관계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돈거래를 통해 성립된 유사연애관계이다. 이반이 돈으로 아노라의 '매력-자본'을 일주일간 구매한 것이다. 그렇기에 이 거래 관계에서 아노라에게는 이반이 요구하는 방향의 여성성, 그리고 이반에게 중심을 맞춘 관계가 요구된다.
이러한 여성성과 수동성은 그가 일상을 나누는 관계에서 보이는 공격성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처음 아노라의 집이 비추어지는 장면에서 아노라는 자신의 언니와 우유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데, 굉장히 거칠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언니는 어젯밤에 우유를 사 왔냐고 묻고, 아노라는 냉장고에서 우유를 봤냐고 되묻는다. 언니가 못 봤다고 하자, 아노라는 "그럼 빌어먹을 우유를 안 사 왔겠지"라고 공격적으로 반응한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아노라는 일상적으로 정을 나누는 관계에서 상대에게 일부러 공격적이고 쌀쌀맞게 반응하는 편이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그 원인으로 유추할 만한 것은 아노라에게 행해지는 일상적인 모욕이다. 일터에서 "가족이 이곳에서 일하는 걸 알아?"라는 질문을 받거나, 잘 모르는 사람에게 "역겨운 매춘부"라는 소리를 듣기도 한다.
그러나 이반의 돈과 아노라의 매력-자본이 교환되는 현장에서 아노라는 직업적으로 상대에게 공격적으로 응수하지 않으며, 관계 내에서의 모든 행동을 이반의 관심사에 맞추어서 행동해 준다. 이반이 자신이 원하는 비디오 게임을 하면서 이반의 욕구에 맞추어서 아노라가 옆구리를 껴안으며 자신은 큰 관심 없는 게임의 화면을 계속 보고 있어 주는 장면이 그 관계에서의 아노라의 태도를 잘 보여준다. 모든 거래의 관계는 매끈해야 한다. 거래하기로 한 것 이외의 불순물이 끼어들면 서로 난감해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반과의 관계에서 아노라는 자신의 공격성을 이반을 향해서 드러내지 않는다.
이반과 아노라의 관계가 변화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은 이반과 아노라의 결혼 장면이다. 이반은 아노라를 데리고 라스베이거스에 갔다가, 충동적으로 청혼을 한다. 그리고 청혼을 한 후, 아노라가 의심하자 바로 24시간 드라이브스루 예식장에 가서 결혼을 하고 서류를 만들어버린다. 이후, 서로를 지칭할 때 가끔 '남편'과 '아내'라고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둘 사이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변화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서로 이 결혼 관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결혼하기 전의 대화에서 이미 모두 대화를 나누었기 때문이다.
"이 한 주가 너에게 즐거웠길 바라."
"너도 즐거웠길 바라."
"즐거웠어."
"나중에 이런 시간 또 갖자."
"그래 꼭 그러자.... 근데... 난 러시아로 돌아가야 해. 왜냐하면 빌어먹을 아버지 회사에서 일하기로 했거든."
(중략)
"네가 그리울 거야."
"(피식 웃더니) 뭐가 그리울 거야? 나? 아니면 내 돈?"
"그야 네 돈이지, 당연히"
"솔직해서 좋네. 그런데 미국인과 결혼하면 러시아로 안 돌아가도 돼."
아노라가 이반과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은 이반의 돈이며, 이반이 아노라와의 관계에서 원하는 것은 러시아에 돌아가지 않기 위해 필요한 아노라의 미국 시민권, 그리고 생략되어 있지만 당연히 수많은 미국인 여성 중 아노라를 선택한 것은 당연히 아노라의 매력-자본 때문이다. 그렇기에 결혼 후에도 아노라는 여전히 이반이 자신이 하고 싶은 비디오 게임을 하는 동안 이반의 옆구리를 끼어 안으며 아노라가 관심도 없는 게임 화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자신에게 중요한 이반의 부모님의 승낙 여부를 물으면서 이반이 못 미덥게 대답해도 평소의 일상적인 관계에서의 아노라처럼 공격성을 발휘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노라와 이반은 둘의 결혼 관계를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아 보인다. 아노라가 이반에게 부모님의 결혼 승낙 여부를 물은 것은 둘의 결혼 관계의 종반부에 해당하는 시기다. 약 2주 정도 지나서 이반의 부모님이 이반이 결혼한 것을 알아차리고 계속 이반의 핸드폰에 전화를 걸고 있는 시기이다. 그런데 둘은 그제야 서로의 부모에 대해서 말한다. 아노라의 어머니는 마이애미에 있으며, 아노라가 자신의 언니와 살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은 그제서다. 심지어 아노라는 이반에게 자신의 언니를 소개하기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을 한다.
결혼은 성인 남녀 둘이서 새로운 가족을 꾸린다는 개념이지만, 그 연장선상에서 각자의 원가족에게 인척을 맺기도 한 것이다. 그렇기에 시부모, 장모, 처형 등등, 유사 가족 관계를 상대의 원가족과 맺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는 그것에 큰 관심이 없음을 보이고 있다. 둘은 서로를 개인적인 거래의 상대로만 여기며, 이들이 이 거래 속에서 원하는 것은 안정된 가정이라기보다는 각자의 환상에 다가가는 일이다. 이반은 어쩌면 아노라와 결혼하여 영주권을 획득함으로써 부모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계속 미국에서 살 수도 있다는 환상을 유지하고 싶어 한다. 아노라는 신데렐라처럼 신분 상승의 환상을 느끼고 싶어 한다.
그러나 둘 사이의 거래가 중지되는 것은 이반의 부모가 보낸 하수인들이 이반의 집에 들이닥치면서부터다. 이반은 하수인들에게서 부모님이 곧 오신다는 소리를 듣자 도망친다. 그리고 아노라가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다. 이반에게 아노라와의 거래에서 원했던 부모와는 떨어진 삶은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수준의 일이었다. 그렇기에 아노라가 절박하게 이반을 찾아도 이반은 반응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노라가 이반과의 거래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어쩌면 아노라가 평생토록 꿈꿔왔던 일이다. 아노라는 스트립클럽을 나오며 신혼여행을 디즈니월드로 가고 싶다고 말하며, 디즈니 공주들이 평생 꿈이었던 것처럼 말하기 때문이다.
아노라가 엮이고 싶지 않은 이반 부모의 하수인들과 함께 다니며 절박하게 이반을 찾아다니는 동안, 이반은 도망쳐서 술을 마시고 스트립 클럽에 가서 다른 여자들과 논다. 그것도 아노라가 근무하던 스트립 클럽에 가서 결과적으로 아노라의 체면을 깎아먹으면서까지. 아노라는 결국 이반을 찾아 절박하게 매달린다. 결혼을 유지하자고 말이다. 그러나 이반은 취해서 말이 없다.
결국 이반은 부모가 오자 부모를 만나러 공항에 나간다. 왜냐하면 이반은 돈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이반은 결혼을 취소하러 라스 베이거스로 가는 비행기에서 아노라를 앞에 두고 자신의 엄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냥 날 죽여요, 엄마. 여자랑 좀 논 게 그렇게 죽을죄예요? 쟤랑 일주일 동안 좀 즐긴 것뿐인데, 그게 뭐가 그렇게 큰 죄라고 난리예요? 그깟 일이 뭐라고!"
이반이 사실은 마음속 한편에서 아노라와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것을 받아치는 아노라의 말을 통해서, 아노라가 사실은 이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었다.
"너는 정말 한심한 개새끼야."
그리고 아노라는 이반의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아들이 지질해서 이런 일이 생겼죠."
아노라는 이반과의 첫 만남부터 이반을 이렇게 평가하고 있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영화는 이반의 첫 등장부터 끝까지 이반이 한심한 찌질이임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거래를 위해 묻어두고 있었을 뿐. 둘은 서로를 진지하게 평생을 함께할 만한 상대로 보지 않았다. 아노라는 한심한 찌질이지만, 돈은 많은 애와 함께 있고 싶었고, 이반은 좀 즐기고 싶었다.
아노라와 이반은 결국 이반의 부모에 의해서 결혼 무효화 서류에 사인을 하게 된다. 둘 다 신뢰한다거나 소중하게 여길 수 없는 상대를 통해서 자신의 환상을 달성하려고 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