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
흐린 날엔 나가고 싶고,
맑은 날은 집에서의 한적한 여유를
갖고 싶을 때가 있다.
사실 날이 좋으면 무조건 밖을 나가
운전석 앞자리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좋아한다.
간혹 무슨 마음인지,
집에서 느닷없는 여유를 누리고
싶어 져 옷을 다 입고 준비했다가
다시 편안한 옷으로 갈아 입고는
거실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에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
하늘, 밭 같은 정원, 올레길 가는 사람들.
실제로 보면 이 셋의 조합이 그리 개연성이
있진 않다고 느낄 때가 있지만
무엇하나 꾸미지 않은 투박한 풍경에
머릿속이 비워지는 신기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러다
“밥만 먹고 무조건 밖에 나가
오늘 작업량을 꼭 채워야지” 생각을 하다가
무슨 변덕인지 틀어 놓았던 음악을 끄고,
밖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 집중한다.
마당에 앉은 새소리와 함께
올레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작게 깔린다.
자연스럽게 들리는 집안일 배경음악에
정성스레 밥을 짓는다.
몸에 좋은 음식과 과일을 먹고
먹은 후, 바로 설거지를 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 환기를 하며 청소기를 돌린다.
어느새 오후 4시.
가려던 카페는 못 갔다. 일찍 문을 닫는 제주니깐.
그래도 매일을 작업에 몰두해
한 자세로 앉아 있는 시간보다
왠지 훨씬 시간을 잘 쓰고 있는 듯한 기분에
만족하는 오후다.
별거 아닌 집안일에 시간을 보낸 것 같지만
그 평범한 일들이 나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걸 문득 깨닫는다.
운이 좋게도 집 바로 옆에 있는
북카페가 열었다.
외투도 걸치지 않고, 뚜벅뚜벅
단 다섯 발자국만 걸어가면
어렵지 않게 카페에서의 호사를 누린다.
오랜만에 커피 한잔으로
그림 작업에 몰두했다.
카페 문 닫을 시간 전까지
그림 하나를 완성한다.
얼렁뚱땅 지나간 하루 지만
나의 또 다른 패턴을 찾은 듯한 날.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마음이 복잡할 시간을 주지 않은 일만큼
스스로에게 작은 칭찬을 건네고 싶은 그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