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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녀시대 Jul 03. 2020

나에게 혜자스러워지기로 했다

팬데믹 셀프러브 


돌아보면 나는 늘 만성 불만족에 시달려왔던 것 같다. 그냥 뭘 해도 항상 불만이고 성에 차지 않아 일상이 피로했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면 항상 민폐를 끼칠까 과도하게 염려해서 남한테 징징거리는 짓은 하지 않지만 대신 차곡차곡 속으로 묵혀둔 화가 쌓여 내면은 늘 빈곤하고 황폐했다. 그러다 임계치를 넘어 폭발할 수준에 다다르면 무언가 새로운 전환점을 만들어내어 평정을 유지했다. 


그렇게 위태위태하지만 전반적으로는 매끄럽게, 그러나 울퉁불퉁 이음새로 가늘고 길게 꾸역꾸역 살아오면서 정작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고 느껴지는 적은 없었다. 여기만 아니면 될 것 같아라고 해서 저기에 둥지를 틀면 얼마 안 가 또 무언가 심히 결핍이 되는 패턴의 반복이었다. 이 루프를 끊어보겠다고 자발적 경력 단절을 감수하며 학업을 다시 시작했는데 이 길도 생각보다 너무 고되고 막막해서 내면의 허기는 여전하다.


나는 원래부터 인생의 빅픽쳐가 없던 사람이었다. 크게 되고 싶은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것도 없었다. 매일을 지탱하는 루틴에는 철저하지만 이것도 그저 수시로 찾아오는 무기력증을 이기기 위한 방편에 불과했다. 성격 상 멀티도 안되고 내 깜냥만큼만 하자는 게 생활신조라, 당장의 과업 및 1-2년에 걸친 계획에 집중하는 게 전략 아닌 전략이었고 그렇게 최선을 다하면 점과 점이 만나 선을 긋게 된다는 신념만은 확고했다. 


어떻게 보면 삶의 불확실성이 그 어느 때보다 팽배한 현 시국에 좀 더 적합한 인간형이었다. 어쨌거나 난 대체로 그냥 생겨먹은 대로 살겠다는 주의여서 내 에자일(?) 라이프 모드에 큰 불만이 없었고 내가 남보다 잘난 건 없어도 못난 건 또 없다는 자존감과 복원력을 무기로 삶의 균형을 맞춰왔더랬다. 그러나 근 몇 년 동안 만성 불만족과는 별개로 균형 감각을 갉아먹는 불안 초조 증세가 찾아왔다. 


한 해 두 해 나이를 먹어가니 나이에 걸맞은 사회가 규정한 norm 규격에 맞지 않는 현재 내 처지가 못내 한심했다. 더 나은 도약을 위해서 몇 년 간 잠시 투자 아닌 투자의 재충전 기간을 가지고 있다는 자위도 잠시. 어쨌거나 나도 슬슬 이제 중년에 접어들고 있고 사회 각층에서 번듯하게 자리 잡은 동년배보다 한참을 뒤쳐졌다는 못난 열패감과 자격지심이 하릴없이 들곤 했다. 


이왕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면 미친 척 좀 더 확실히 돌아가자 해서 전혀 예정에 없이 결정한 복수학위 프로그램. 생각처럼 영어도 안 늘어 전공지식도 안 쌓여 그러나 아주 서서히 궤도에 올라가고 있다는 자기만족적 성취감에 도취되었을 무렵 예고도 없이 닥친 팬데믹. 인생 2막은 좀 더 제대로 열어보겠다는데 이렇게 또 운명이 잔혹한 태클을 거나 싶어 한동안은 하루에도 수시로 찾아드는 원망과 비관과 낙담이 가득한 시간도 견뎌야 했다. 


그렇게 하루를 견디고 두 번째 학기를 마치고 나니 불안이 걷히고 사리가 또렷해지는 열반 아닌 열반에 다다랐다. 학위를 수여하면 안온했던 학교를 뒤로 하고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 하는데 대공황 이래 전례에 없는 최악의 경제 불황 속에서 외국인 신분으로 멀쩡한 직장을 구할 수나 있을지 하는 초조함은 여전하다. 그러나 너무 나를 닦달하지도, 필요 이상으로 현재를 극화하지도 말고 그저 달관하자는 평화적 노선을 택하기로 했다. 


인류가 포스트팬데믹에 진입한 순간 '노말'은 종말했다. '뉴 노말'은 어제의 놈이 오늘의 놈과 다를 수 있음을 시사한다. 난 이 극대로 팽창된 불확실성의 시대를 나의 abnormal한/하다고 여겼던 인생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아전인수의 모멘텀으로 재해석했다. 기존 방식의 쇄신이 불가피한 포스트팬데믹 사회에서 삶의 성패나 우열은 지극히 가변적인 허상에 불과하다. 노말이 사라진 미래를 직시하는 순간, 외부의 관점이 아닌 내 고유한 맥박대로 살고 있는 내 인생이 그 어느 때보다 '노말'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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