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하나씩 이루면서 살고 있어요.
글을 쓰다 보면 종종 같은 의미의 문장을 똑같이 반복해서 쓰는 경우가 있다. 처음 생각나는 대로 막 적어 나갈 때는 내가 동일한 의미의 문장을 다른 언어로 써내려 갔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계속해서 읽고 또 읽어보다 보면 중복된 문장들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중복 글들을 지우고 다듬은 후 이제 됐다, 이 정도면 괜찮다, 하고 마무리한 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번 보면 또 같은 실수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버려지지가 않는다. 내 나름 한 문장 한 문장 고민해 가며 쓴 글들이기에 단어 하나조차도 쓱~하고 지워 버리가 아까울 때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버려야 한다. 그냥 둘까 고민도 몇 번 해본다. 그저 아까운 마음에. 그런데 지우고 한번 더 전체 문장을 읽어 보면 지운 후가 확실히 읽기가 더 쉽고 덜 지루하게 느껴진다.
대학원을 다닐 때 읽었던 논문들이 있었다. 졸업하고 1년 반 정도 회사를 다니다 공부를 조금 더 하고 싶은 욕심에 대학원을 들어가 다시 학생이 되었다. 쉽지 않은 길이었다. 학부 때 수업과 대학원 수업은 하늘과 땅 차이처럼 느껴졌다. 한 수업마다 5개의 영어 논문을 읽고 요약해서 가야 하는데 그런 수업이 3개라면 일주일에 읽어야 할 논문이 무려 15개나 된다. 한국어로 읽어도 도통 이해가 안 가는 내용들인데 그걸 심지어 영어로 읽어야 하다니. 당시에 내가 왜 멀쩡한 회사를 때려치우고 학교로 돌아왔을까 하는 후회가 마구마구 밀려왔었다. 그러니깐 이 15개의 논문들을 모두 프린트해서 밑줄 그어 가며 밤새 읽었었다. 완벽하게 이해는 못할지언정 최소한 읽고는 수업에 참여 하자가 목표였다. 한 학기 두 학기.... 밑줄 박박 그어가면 읽었던 그 프린트 나부랭이들. 문서 파인더에 고이고이 꽂아 놓고 전공 책처럼 모셔 놓아두었었다. 고생 고생하면 보던 것들이라 대학원 졸업 이후에도 이 종이 더미들을 버릴 수가 없었다. 엄마는 그게 뭐냐며, 방 어지럽다면서 얼른 내다 버리라고 했었다. 혹시나 한두 번은 그래도 일하면서 참고할 만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엄마에게 '절대 절대 버리지 마'를 명심시켰다.
1년, 2년, 3년, 4년... 대학원 졸업 후 단 한 번도 그 프린트 더미들을 본 적이 없다. 책도 아니라 책꽂이에 꽂아 두면 인테리어용으로도 쓸만한 물건도 아니었다. 만약 누군가 내 책장을 본다면 쓰레기 더미 막 찔러 놓은 정리정돈 안된 그런 책장으로 보였을 것이다.
하루는 맘 잡고 방청소를 하면서 안 입는 옷들, 안 쓰는 오래된 화장품들 하나하나 버리다 그 종이 더미들, 사실 나에게는 단순 종이 더미가 아닌 2년간 학구열을 불태운, 그냥 보기만 해도 '그래, 나 열심히 공부했다' 하고 스스로에게 칭찬할 만한 전공 서적 이상의 그 무언가 인, 그들과 눈이 마주쳤다.
스르륵~ 하고 훑어보는데 그때 공부했던 흔적들이 보인다. 그저 추억과 감상에 젖어 버리지는 못하고 애물단지로 전락한 내 논문들. 그래 버리자. 버리기로 결정했다. 마음 바뀌기 전에 얼른 내다 버렸다. 막상 버리고 난 후 엘리베이터 타고 집으로 올라오는 데 갑자기 후회가 밀려왔다. 참 그게 뭐라고.. 왜 이리도 침착하게 되는지. 그리고 집에 돌아 책장을 보았다. 예전보다 훨씬 깔끔하고 정돈이 잘 된 느낌이 들었다. 5분 만에 버리길 잘했네 하고 그 더미들이 생각이 나지 않았다. 버리길 참 잘했다.
버려야 하는 것 중, 버려야 하는 물건과 버려야 하는 문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버려야 하는 마음도 있다.
가끔은 누군가로부터 받는 예상치 못하게 가슴 한켠을 후벼 파는 질문들을 받을 때가 있다.
"그 나이까지 연애도 안 하고 뭐 하셨어요?"
"그 나이까지 결혼도 안 하고 뭐 하셨어요?"
"그 나이까지 제대로 된 커리어도 안 쌓고 뭐하셨어요?"
"그 나이 될 때까지 그것도 모르셨어요?"
"그 나이 될 때까지 그 정도 돈도 안 모아놓으신 거예요?"
이런 무례한 질문들을 받고 난 후 그냥 한 귀로 흘려보내면 참 좋으련만, 쉽게 버리지 못하고 차곡차곡 쌓아 놓게 되는 마음이 있다. '그러게. 나는 도대체 무얼 하면서 살아온 걸까'하는 자존감을 바닥까지 가져가게 생각. '나는 이 나이 때까지 대체 뭐하면서 산 거지' 하는 해답 없는 물음이 다시 시작된다.
버려야 하는 마음이다. 버려야 한다. 하지만 참 버리기 쉽지 않은 것 중에 하나이다.
나는 그저 평범한 집안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흔녀 중 한 명이다. 지방에서 태어났으며 아빠는 공무원이었고 엄마는 주부셨다. 부모님들은 밥 세끼 꼬박 먹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싶은 시절을 살아오셨기에 내가 대학생이 되기 전까지 나 역시도 무언가를 크게 누리면서 살아오지 않았다. 아빠가 공무원을 관두시고 사업을 시작하면서 조금 여유가 생겼고 그때부터 아마 엄마와 아빠는 친구분들과 중국 여행을 시작으로 인생을 조금씩 즐기시기 시작했던 거 같다. 뭐 조기 교육이란 걸 받아 본 적이 없었으며, 어릴 적 해외를 나가 본 적도 당연히 없었다. 그렇게 내가 사는 그 안의 굴레에서 얽히고설키며 살아온, 서울이 가장 큰 세계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하면 자랐었다. 그런데 어렸을 적부터 한 가지 소원이 있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것(왜 그런 생각을 가졌는지 그 이유는 나도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대학교 1학년 시절, 영어 교양 수업을 듣는데 담당교수가 유학을 갔다 온 후 차를 몰고 가며 팝송을 듣고 있는데 팝송 가사가 들렸다는 것이었다. 그 순간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고. 교수님이 학생들 잠깨라고 스치면 해 준 이야기인데 왜 인지 모르게 나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유창하지 않아도 나도 다른 나라 말을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신기하고 좋을까 라고 생각했었다. 교수님이 말씀하셨던 팝송 가사가 들리는 그 순간은 어떤 기분 일까 하고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그게 계기되었다.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막연히 나도 팝송 가사가 들렸으면 좋겠다 하고 생각했다.
<2016년 7월, 영국 출장>
혼자서 프로젝트 팀을 대표해서 영국 출장을 와 있다. 영국 담당자들과 이 요구사항은 되고 저 요구사항은 안된다며 나름 주장을 펼치기도 하고 때론 언성을 조금씩 높이기도 한다. 원어민 마냥 유창하지는 않지만, 또한 어디다 내놓고 "저 영어 좀 합니다" 하고 자랑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현지인들과 함께 업무를 볼 수 있고 토론을 할 수 있게 된 건 내 나름대로 꾸준히 공부해 온 결과물이다. 보통의 한국 사람처럼 서양 사람 울렁증이 있었을 때도 있었다. 2년 공부하고 '원어민 되었어요'와 같은 LTE급 결과물도 물론 아니다. 10년 넘게 천천히 느리게 해오다 보니 적어도 이렇게 내 의사 전달을 할 수 있게는 되었다.
회의 중 한참을 서툰 영어로 떠들다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기간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목표는 하나 이루었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완벽하게 버리지는 못할 것이다. 6개월, 일 년, 이년만에 짠 하고 성과를 내놓았던 것은 아닌, 너무 느려 나 스스로 조차 변한 지 느끼지 못한 그것들..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나이까지 뭐하면서 살았어요' 하고 나를 모르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된 질문 때문에 갖게 되는 도대체 나는 뭐하면서 산 걸까 하는 생각은 오늘은 잠시 버려두려고 한다.. 아니 그 마음은 영원히 버리도록 노력해 봐야겠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너는 모르는 나는 알고 있는 나만의 성장 목록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