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당이나 성당 또는 교회에서 성직자의 설교나 설법을 들을 때 우리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설교는 내 아내가 들어야 하는데 아니면 저 설법은 우리 남편에게 하는 말 같은데 하면서 가끔 아쉬워 할 때가 있다.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바로 자신에게 하당되는 말은 슬쩍 귓가로 돌려버린다.
보시나 나눔은 남에게 권유하는 행위가 아니고 바로 자신이 직접 행해야 하는 행동이다.
SNS가 보편화되면서 이에 관련된 정보들이 너무 많이 난무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글을 받았을 때 남 핑계의 범위가 넓어져서 이 말은 이 친구에게, 저 말은 저 형님에게 꼭 들려주고 싶다로 까지 확산이 되었다.
언제나 나만은 예외로 돌려놓고...
우리가 대학생 시절인 60년대 말 시청 앞 서소문 길목에 대한일보 청사가 있었다.
어느 해 태풍으로 인해 전국에 걸쳐 막대한 수해 피해가 발생했다. 신문사마다 수재 의연금 캠페인을 벌렸다.
이 신문사는 이렇게 하여 독자들로부터 받은 돈의
일부를 자신들의 용도로 전용하여 사용했다가 들통이
났다. 사주는 구속되고 얼마 후 신문사는 문을 닫고 말았다. 보시나 나눔은 남을 권유하여 자신의 배를 채우는 행위가 결코 아니다. 조용히 스스로가 실천하는 이웃 사랑의 기본 행위이다.
금강경에 보시 나눔과 배품)는 보시를 한 사람도 모르고, 받은 사람도 모르고, 제삼자도 모르게 하라고 하였다.
또 한 깨달음을 얻으면 들어내지도 말고 자랑하지도 말고 더 깊은 깨달음을 향해 용맹 정진하라고 하였다.
성경의 야고보서 3장 1절에
"Not many of you should presume to be techers, my brothers, because you know that we who teach will be judged more strictly. "형제들아 선생 된 자는 더 엄중한 심판을 받아야 하니 함부로 선생이 되려고하지 말라 " 하였다.
즉 함부로 남을 가르치는 자는 더욱 엄중한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다.
보시나 베풂은 물질적인 것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사안을 두고 마음을 다한 정신적 위로나 배려는 때론 어떤 물질적인 나눔보다 훨씬 더 값어치가 있다고 하였다.
오늘 왜 이리 보리심이 발동할까?
죽을 때까지 가진 것 모두 다 쓰고
가자고 친구가 카톡에 옮겨 놓은 글을 오늘 아침에 두 번이나 읽었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실천하기가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은 것 같다.
어떻게 누구와 나누느냐가 더 크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이다.
자식에게, 여자 친구에게, 부모에게, 상사에게 그것도 아니면 아내에게 이 모두 참 보시의 범주에 들지 못한다고 한다.
가난한 형제에게, 어려운 이웃에게, 나 같이 배고픈(?) 친구에게, 외로운 고아나 과부에게 몸이 불편한 장애인에게 때론 먼길을 여행하는 길손들에게 베푸는 보시가 참 보시라고 하였다.
이슬람교에서도 구제해야 할 일곱 가지 항목에 이것들이 모두 다 들어있다.
금년에도 어영부영 벌써 상반기가 지나가 버렸다.
연초에 연말 정산을 하면서 작년 한 해 동안 남을 위해 내가 선의로 지출한 금액을, 교회 헌금 포함, 대충 계산해 보았다.
이 중 가까운 친구들에게 기분 좋게 지출한 내역이 거의 없었다. 부끄러웠다.
돌아가며 내는 회식비나, 연회비, 어쩔 수 없는 입회비는 그런대로 지출 내역에 들어있다. 내가 한번 멋지게 선심을 쓰거나 기분 좋게 객기를 부린 적은 없고 돈을낼 때마다 가성비 따지기에만 급급했었다.
다시 한번 짚어보자.
자율적으로 내어도 되고 안 내어도 되는 중, 고, 대학의 동창회비, 적십자 회비, 그린피스 후원금 , 아프리카 난민 구호비, 불치 환자 돕기, 각종 구호단체 모금 등 얼마나 우리가 아니 내가 성의껏 동참했었나?
어느 정도 참여는 하였으나 너무 미온적이었다.
이제부터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적은 금액이나마 좀 더 적극적으로 동참해보자고 마음속으로 다짐을 해본다.
실행은 내일부터가 아니고 바로 오늘부터다.
앞으로 이 세상에 살아있을 시간도 줄고 만나고 싶은 사람 수도 점점 줄어든다.
수중에 지니고 있는 재물도 줄어드는 것이 당연한 이치고 순리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어 갈수록 노후경제에 대한 불안을 더욱 키운다. 한마디로 이것은 노욕에 불과하다.
인간의 삼대 욕심보다 더 추한 것이 노욕이라고 하였건만 이것을 마치 놓치면 안 되는 귀한 보물인양 아직도 품에 안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코로나도 기세가 꺾이여 하나둘씩 모든 사회생활이 정상화되어가고 있다. 보시 중 최고의 보시는 친구들에게밥 사주고 술 사 주는 것이라고
몇 번이나 거짓 교사 노릇을 하였건만, 밥 사주겠다고, 술 한잔하자고 전화를 걸어오는 친구는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늘 역시 감감무소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