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생각

by 김 경덕

고향생각


가을밤

울 밑에 귀뚜라미 울던 달밤에

기럭기럭 기러기 날아갑니다

가도 가도 끝없는 넓은 하늘로

엄마 엄마 찾아서 날아갑니다

- I -

새벽에 꿈을 꾸었다.

소싯적 고향의 장터 마을과 조포(두부) 집 앞마당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심부름을 갔다가 부끄러워서 선뜩 들어가지 못하고 조포 집 앞에서 망설이는 장면이었다. 이 집 딸 정*이가 초등학교 한 반이고 거기다가 외상으로 조포를 사러 갔기 때문이다.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란 두 살 터울, 미국 사는 사촌 형이 갑자기 귀국을 했다. 차 속에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나누었다. 여기에다 저녁 T.V에서 본 가평 잣두부가 겹쳐져서 꿈속에서나마 그리운 고향으로 잠깐 내려갔었나 보다.


장터가 있는 아랫마을 기우 막(안막 1구)에는 매 3,8일에 5일장이 열린다. 장터까지는 우리 마을에서 당시에는 한 마장 정도라고 하였는데 지금 리수로는 약 2.5Km 정도 된다.

45가구가 살았던 우리 마을에는 구멍가게가 없었다.

철없는 시절 엄마 삼짓돈을 훔쳐 밤 중에 군것질하려 장터 마을까지 몰래 다녀오기

했지만, 갑자기 집안의 백열전구가 나가거나 일꾼들 찬거리가 부족할 때 두부집이 있는 이 장터 마을로 심부름 가느라 누구보다 자주 들락 거렸다.


눈을 감고 조용히 더듬어 보니 당시 장터의 모습과 이 마을에 살았던 초등학교 같은 반 동무들의 집들이 아주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진다.


고향집을 집을 나서면 큰 둑을 따라 신작로와 나란히 잘 정비된 농수로가 남쪽으로 곧게 뻗어 있다. 2km 정도 내려가면 농수로가 남서쪽으로 방향을 틀며 도로와 헤어지고 다시 50M 더 가면 도로도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왜, 갈라진 신작로 길 한가운데 있던 집의 뒷 태가 마치 돌아앉아 볼일을 보는 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고 생각했을까?

또래에 비해 분명히 조숙한 편은 아니었는데...

제방을 따라 큰 도로로 바로 내려가면 제법 큰 정미소가 하나 있었다. 하굣길 배가 고플 때 마당에 말리려고 늘어놓은 생 국수에서 떨어진 낙 국수를 주워 먹은 기억이 난다.

다시 조금 더 내려가면 시장으로 들어가는 도로가 서쪽으로 갈라져 마을로 들어간다.

내리막 왼쪽 첫 집은 사진관이었는데 이 집 큰 딸은 같은 반 이*자다. 오른쪽에 이발소가 있고 왼쪽에는 자전거 수리점이 하나 있었다. 동급생 강**의 집이다. 아마 외지에서 이사를 온 듯하였는데 이 친구는 외동아들이었다. 그래인지 지금 생각해보니 예의와 체신머리가 조금 없었던 급우 같았다.

다시 동네 초입 신작로가 갈라진 곳으로 되돌아가 보자. 오른쪽 도로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면 바로 왼쪽에 당시, 서울에 있는 유명 대학에 다닌다는 누나의 친구 집이 있었고 조금 더 들어가 오른쪽 골목길로 내려가면 허*의 집과 신*순이 집이 있었다. 명의는 인물도 이뻤고 날리기를 무척 잘했다. 여자 동급생들 집이라 들어가 보지는 못했지만 위치와 모습은 선명하다.

더 들어가면 빈번하게 들락 거렸던 죽마고우 조*환이 집이 있다. 대문은 없고 사철나무와 탱자나무로 울타리를 나지막하게 쳐 놓았다. 오른쪽에 사랑채인 3칸 기와집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남쪽 끝 방에서는 당시 선생님이 섰던 친구 부친께서 고시 공부를 하고 계셨다.

왼쪽은 채전 밭이고 우물이 집 앞에 있고 4칸 초가집 뒤로는 대나무가 집을 감싸고 있었다.

집 오른편 가까이 지나가는 수로가에는 옛날에 소가 돌려서 곡식을 빻았다는 연자방아의 큰 맷돌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당시 어린 소견에도 이 돌을 우리 집에 옮겨 놓고 싶었다. 지금 그 맷돌은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아직도 나처럼 백수가 되어 누워만 있을까?

다시 도로를 따라가면 조포 집 정*이 집이고 그다음에는 일제 수탈의 본 거지였던 수리조합이 있었다. 당시 묵직한 철문 뒤에는 넓은 마당과 제법 규모가 큰 본관 건물이 있었는데 본관 앞에 서 있던 국기 게양대에서 항상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어느 날 아버님과 함께 여기를 지나갔는데

"이제는 왜놈 깃발 대신 우리나라 국기가 걸렸네"라고 푸념조로 말씀하셨다. 아마도 일제시절 놈들의 수탈에 대한 회한 때문에 무심코

뱉은 말 같았다.

바로 왼쪽에는 중학교 울타리가 이어져 있고 그 남서쪽 모퉁이에는 정문이 있었다. 이 중학교 정문은 언제부터인가 동남쪽 담장 모퉁이로 옮겨졌다. 오른쪽 우거진 대나무 숲 안에는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일본식 가옥이 있었는데 이 집이 바로 우리 면의 유일한 병원이었다.

나는 초등학교 일 학년 어느 여름날 불의의 사고로 이마를 크게 다쳤다.

비가 쏟아지는 날 피를 철철 흘리며 담임 선생님의 자전거에 실려서 이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 선생님은 다급했던지 제대로 마취도 하지 않고

내 이마를 열 바늘이나 궤 매었다. 심한 통증 때문에 발악을 하며 나는 알고 있는 욕이란 욕을 전부 다 의사 선생님에게 토해낸 기억이 난다.



-II-


중학교 담장을 끼고 왼쪽으로 계속

내려가면 담장 끝이 초정으로 가는 도로와 마주친다. 길을 건너면 바로 장터가 시작되고 왼쪽에 있는 두 번째 집에는 5학년 때 전근 오신 박기우 선생님이 사셨다.

큰 딸은 동급생인 *순이다.

불행스럽게도 바로 아래 남동생이 당시에 유행한 일본 뇌염에 걸려 어린 나이에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날이 되면 선생님 집 맞은편에 땜질 전문가였던 *수 아버지가 땜 전을 펼쳤다. 지독한 절약가(?) 셨던 우리 아버지는 내 구멍 난 고무신을 장날에 여기 가지고 가서 땜질을 한 후 다시 신으라고 하셨다. 여기에 큰 마루가 북쪽으로

난 옛 주막집 있었다. 장날에는 국밥을 말아서

팔았는데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조금 더 들어가면 좁고 길게 지붕만 있는 싸전(쌀이나 곡식류)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한영이 할머니가 제일 유명한 되장이셨다. 당시에는 쌀을 무게로 달아 거래하지 않고 나무로 만든 되나 말에 담아 계수를 세어가면서 거래량을 가름하였다. 우리 집에서 정미소를 운영하였기 때문에 키가 훤칠하게 크신 한영이 할머니를 자주 만나 볼 수가 있었다.

둘째 골목은 옷, 신발과 같은 잡화 전이 펼쳐지는 저잣길이고 세 번째 골목은 채소류나 장작 같은 땔감이나 닭이나 강아지 같은 살아있는 동물을 거래하는 난전이었다.

세 번째 장터거리 북쪽에는 원이 아버지가 운영하는 또 다른 자전거 수리점이 있었다.

원식이 친구는 말 수가 적고 참 착했었는데 몇 해 전 충청도에 살다가 먼저 하늘나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 집 건너는 똑순이 여자 부반장 현 *숙이 집이다.

기억으로는 창숙이 아버님도 선생님이셨다.

아들이 해병대 장교라고 졸병 출신인 우리에게

자랑을 했는데 지금은 뭘 하고 계시나?

조금 더 들어가면 백 *중 어머니가 운영하셨던 포목점 즉 정중이 집이 여기 있다.

체구가 자그마하셨던 정중이 모친께서 마루에 앉아 당신 키만 한 대나무 자를 들고 옷감을 넘기며 자질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대신 정중이 부친께서는 키가 훤칠하게 크셨던 분으로 기억이 된다. 한편 정중이 형님은 4학년 때 우리 반 담임이셨던 백정길 선생님이시다.

백 선생님이 어느 날 종례 시간에 자네들은 참으로 좋은 시대에 태어났다. 자네들이 커서 어른이 되면 자가용을 타고 다닐 수도 있고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행도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철없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셨다. 당시는 6.25 종전 직후라 모두의 삶이 지극히 어려웠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별로 없었던 시절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 하고 소리를 지르며 선생님의 말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답을 대신하였다.

지금 생각하니 선생님께서는 정확하게 우리의 미래를 예측하고 계셨다.

해 전 동창생인 정중이 아들, 선생님의 조카, 결혼식에 선생님께서 참석하셨다.

반가운 마음에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지만 연로하셔서 우리들을 제대로 기억해 내지 못 하셨다. 무척 안타까웠다.


다시 장터로 돌아가자.

남쪽 끝에는 장터에서 제일 큰 양철 지붕 집이 있었는데 여기가 바로 어물전이다. 어느 해 겨울이었다. 그 해 겨울에 맹독이 있는 생선 복어가 많이 잡혔나 보았다. 이곳 시골 시장에까지 생복어가 많이 들어왔다. 독 있는 복어를 제대로 다룰 줄 몰라서인지 사 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바닷가 출신인 어머니는 복어를 다룰 줄 아셨다.

장 날 팔다 남은 참복을 가마니에 가득 넣어서 리어카로 우리 집에까지 싣고 온 적이 있다. 밤새 복어 배를 갈라 내장과 피를 빼고 뼈를 다듬이 질 한 후 빨랫줄에 말려 놓고 겨우내 복어국을 먹었다.

아련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지난날 추억이다.


어물전을 나와 안 강이 있는 동쪽으로 내려오면 일제 때 지은 커다란 양곡 창고가 있다. 여기에 우리 지방에서 생산된 질 좋은 쌀을 저장했다가 큰 배로 일본이나 남방으로 송출하였다 한다.

창고를 돌아 조금 더 들어가면 울타리도 마루도

없는 2칸 홑집, 우리의 영원한 반장 김*수 집이 있었다. 그 이웃에 김호순이 집도 있었고....

좁은 길을 조금 더 들어가면 공부도 잘하고 말도 논리 정연하게 잘하였던 박 두윤 집이 있었다.

참 똑똑한 급우였는데 가정 형편 때문에 두윤이는 중학교에 진학을 하지 못했다.

참으로 안타깝기도 하고 아깝기도 한 초등학교 동창생 중 한 명이다.


어느새 장터 마당과 장터 마을 친구 집들을 모두 돌아다녀 보았다. 혹시 빠진 친구는 없나?

여기 나오는 자전거 포 아들 원식이와 신정의 우한영, 초정의 장홍수, 괴정의 이순신, 안마 2구의 김병호, 조눌리의 서 연국은 벌써 고인이 되었다.

먼저 간 친구들의 명복을 빈다.

그리고 보니 안막(2 구도 포함)에는 해병대 출신이

4명이나 된다. 나까지 합치면 동창 남학생 60명 중 5명이 해병대 동지다.


옛 고향 친구들의 모습과 집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혹시나 오해가 있을까 봐 걱정이 된다.

전혀 개인감정이 없이 생각나는 대로 적었으니

추억의 뒤안길로만 조용히 들어가 보시기.... 바랍니다.


가을밤 외로운 밤벌레 우는 밤

시골집 돌담길이 어두워질 때

엄마품이 그리워 눈물이 나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2022, 9월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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