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밤이다. 혼자서 쓸쓸히 밤을 지새운 이 X-mas tree가 나보다 더 초라해 보인다.
오히려 내가 미안해진다.
그래 왕따 당한 나와 초라해진 너랑 우리 동무하자. 동무하여 함께 추억의 X-mas 뒤안길로 한번 깊숙이 들어가 보자.
* * *
소싯적 X-mas는 설레는 기분으로 구제품을 기다렸다. 어린 마음에도 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지
"기쁘다 구제품 나왔다
똑 같이 갈라라
똑 같이 갈라라
목사는 목도리
장로는 장갑
집사는 짚신
똑 같이 갈라라
똑 같이 갈라라 "
이렇게 찬송을 개사해서
또래들과 함께 부르면서
골목길을 누비고 다니다가
목사님 앞에 끌러가 혼줄이
나기도 했다.
12월이 들어서면 바로 밤마다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공연 연습이 시작된다.
이때쯤이면 교회 청년들이 산에서 잘라온 적당한 크기의 소나무를 본당 설교대 좌우에세워 놓는다.
장식은 우리들 몫이다.
매일 밤 소나무에 매달리는 장식이 불어난다.
흰 눈은 이불속에서 빼낸 목화솜이 대신하고, 별은 미군들이 먹고 버린 깡통을 뒤집으면 그 속면은 금빛이다. 가위로 별 모양으로 자르면 멋진 별이 된다. 작은 종도 이 깡똥으로 만들었던 것 같다. 가관은 구제품 속 카드에서 본 선물 담는 커다란 버선이다.
궁리 끝에 엄마의 버선 한쪽을 들고 가서 걸어 놓은 적이 있다.
그것도 낡은 버선을...
이것이 처음이고 마지막인 내 생애 최고의 설치 작품이었다.
교회와 한울따리에 있었던 고향집은이브날 저녁이면 분주해진다. 새벽 찬양 나갈 성가대원들이 먹을 국밥을 준비하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키만큼 큰 대구가 주 재료였다. 가마솥에서 밤새 끓인 후흰 사발에 퍼 주던 이 국밥 한 그릇, 지금도 올라오는 하얀 김이 내 얼굴을 감싸고 있다.
등잔불을 앞세우고 십리길을 돌고 돌며 교우들 집 앞에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추위도 잊고 목청껏 외쳤다.
우리는 약간 비양끼가 썩혀있는 공돌이(공고) 출신이다. 고3 크리스마스이브 때이다.
친구의 주선으로 주판 들고 다닌 판순이 즉 여자 상고생들과 친구 하숙집에서 이브 파티를 벌렸다.
처음으로 경험한 여학생들과의 짝짓기 파티였다. 트위스트 추고 줄 밑을 통과하는 람보라는 춤도
춰 봤다. 한참 기분이 고조될 때쯤 인근 공장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였다. 생각지도 않은 대형 캠프 파이어만 즐기고 파티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이것도 잊히지 않는 아련한 지난날의 추억이다.
군 시절 이브는 악몽인지 요행인지 모를 정말 아찔했던 위험한 추억이 있다. 함께 입대한 죽마고우인 조해병은 포항에서 떨떨이 김해병은 진해에서 각자 외박증을 들고 이브날 초 저녁 부산 남포동에서 만났다.
당시 이루어진 상황 자체가 지극히 위험한 설정이었다. 영내 생활의 고된 군기와 김신조 덕분에 연장된 복무기간, 입대 시 25 개월이 36개월로 연장됨, 때문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있을 때이다.
자리를 함께한 민간인 신분인 친구 둘은 우리가 취기가 오르며 말이 거칠어지자 슬그머니 자리를 뜨고 말았다. 이때부터 기억의 필름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완전히 맛이 간 개병대 두 녀석이
그 좁은 남포동 길에 들어섰다.등에 떠밀리어 가야만 하는 이브날 저녁의 남포동 길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나아가는 길 앞은 탄탄대로였다.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술을 청해 마셨다. 그러나 술값을 지불한 기억은 없다. 왜냐하면 호주머니에
돈이 없었으니까. 우리가 다가가면 사람들이 피했다는기억만 어슴프레 머릿속에 남아있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뜨고 보니 우리는 남포동에서 3km 이상 떨어진 경남여고 앞 어느 여관방에 누워 있었다. 다치지 않고 살아남은 것만도 천만다행이었다. 더군다나 우리 둘 모두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전혀 기억이 없었다. 전날 폭음 때문에 골이 깨어질 듯이 아팠던 거룩하지 못한 어느 해 성탄절 아침이었다.
내일이면 성악가로 데뷔한다.
초등학교 1년 차 손녀의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장 순서에 성악가 김 XX로 올라있다.
평소에 노래를 부르거나 영어로 된 책을 읽으면 할아버지는 노래도 못하고 영어 발음도 나쁘다고
입을 가로막으며 핀잔을 주던 녀석이었다.
웬일일까?
얼마 전 교회 지휘자로 부터 찬양 연습을 할 때 노래를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다 하였더니,
누가 그 말을 믿겠느냐고 의심하던 터였다.
정말 내가 노래를 잘하나???????
지정곡 'white christmas'를 아내로부터 맹 교습 중이다.
결과는 묻지 마세요.
2013,12,23
이제는 구제품을 나누어 줄 목사님도 뜨거운 왕 대구 국밥을 퍼 주시던 어머님도 모두 먼 길을 떠나셨다. 람보 춤을 함께 추던 친구들도 하나 둘 길 떠나기 시작했다.
비록 성악가 데뷔 솔로 무대에서 실패하기는 햐였지만 이 꿈은 아직도 지니고 있다. 성악가로 인정해준 손주들도 이제는 바쁘다며 달이 넘어가도 전화 한 통 걸어주지 않는다.
아내의 무관심도 날이 갈수록 도를 더해 간다.
이제부터는 내가 갈 길을 내가 스스로 헤쳐 나아가야 하나보다.
My way의 노랫말 중 한 구절이 나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나는 내 할 일을 다 했고 힘들었던 일도 어떤 편법도 없이 헤쳐왔다.
나는 내 모든 일을 스스로 계획했고 그 길을 따라 최선을 다해 걸어왔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방식대로 살아왔다는 것이다."
"I did what I had to do
And saw it through without
exemption
I planed each charted course,
each careful step along the byway
And more, much more than this
I did it my way."
어쩌면 금년 크리스마스트리가 내가 준비하고 장식한 마지막 트리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래도 괜찮고 견딜 만 하지만 찾아오는 사람 없이 외로이 거실을 지켜야 할 트리가 너무 애처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징글벨도, 화이트 크리스마스도, 조요한 밤 거룩한 밤도 이제는 마음속의 노래로 자리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