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기행(3)

by 김 경덕

매화기행


친구 따라 고향을 다녀왔다.

3년 차 떠난 심매(尋梅) 기행 중 금년에는 남녘 땅 김해가 포함되어 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출발을 하였더니 밀양 IC를 10시 이전에 통과하였다. 학창 시절 몇 차례 이 도시를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렇게 반듯한 향교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직 날이 차가워서인지 인적은 없고 대나무 숲에 둘러 쌓인 향교 뜰은 싱그러운 아침 햇살만 가득하다. 대나무 숲 너머로 올려다 보이는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다. 깔끔하게 정돈된 향교 뒤뜰의 매화 한 그루가 고개만 반쯤 내밀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때가 너무 일러 좋은 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예상과 달리 꽃이 70% 정도 피어있는 적기에 찾아온 꼴이 되었다.

뒤의 대나무 숲이 찬 바람을 막아주고 앞의 향교 기와지붕이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나 보다.

이 향교매의 앉음새도 예사롭지 않았다.

명륜당 뒤뜰에 살짝 돌아앉아 있는 것 같지만 건물을 이용하여 숨길 것은 숨기고 자랑할 것은 맘껏 드러내고 있었다. 뒤편의 돌담장과 그사이의 파란 작은 쪽문 그리고 대나무 숲이 기막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 향교매가 아마도 밤마다 저 쪽문을 열고 대숲에 몰래 들어가 대나무와 밀회를 즐기는 것 같은 모양새다.

궁금하여 문고리를 잡아보니 거기도 지난밤에

사용하였는지 매향이 가득하다.

그래서 남녀를 다른 말로 梅竹이라고 에둘러서 표현했었나?

언덕에 올라 가까이 다가가니 더욱 암향이 코끝을 자극한다. 정말 묘하게 가슴이 띤다.

다음에는 밤에 찾아와 저 쪽문을 열고 몰래 대숲에 들어가 나도 밀회를 한번 즐겨 보리라.


여기에서 차로 불과 10여분 거리에 금시당 백곡제가 있다.

이곳은 조선조 정승 이 광진이 은퇴 후 낙향하여 밀양 강가에 세운 정자다. 앞뜰에 조용히

자리 잡고 있는 매화는 별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대신 이 광진이 1566년에

심었다는 거목 은행나무가 더 주목을 받고 있다.

약간 우울기가 감도는 백곡매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위로해 주었다. 강바람이 차가워서인지

아직 개화가 덜 되어 우리에게 미안해하는 눈치다.

"괜찮아"

매화 4 귀에 '봉우리가 貴하고 꽃은

賤하다'라고 했으니 그것으로 족하다.

이 정자에서 바라보니 밀양강 너머로 멀리 김해 산야가 보였다.

시인 박목월이 이곳 밀양을 지날 때, 강 건너 김해 벌판을 바라보면서 읊었다는 시가 생각났다.


나그네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같이

가는 나그네


운율이 너무 편해서 평소에 애송했던 시라 저절로 입속을 타고 흘렸다.


일정이 빠듯해서 새로 난 고속도로를 타고 서둘러 앙산 통도사로 넘어간다.



명 고찰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고찰의 때깔이 해가 갈수록 너무 기름져 저 간다. 고색창연한 옛 모습은 사라지고 사찰의 윤기가 점점 번들 거린다.

1964년 가을 처음으로 여기를 찾아왔다.

통도사 입구 시외버스 정류장에 내려 한 시간 이상 비포장 도로를 따라 걸어서 올라왔다. 좌우에 노송을 거느린 초라한 일주문을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대웅전을 비롯한 주변 전각들에 궁끼가 잔뜩 끼어 있었다. 불심이 전혀 없는 어린 학생이었지만 전각 보수를 위해 시주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였다. 그 후 여러 차례, 특히 코로나 이후부터는 이런저런 이유로 매년 방문을 하게 되었다.

올 때마다 이곳이 산 중 구도처라기보다는 속세의 한 거리를 걷고 있다는 느낌을 점점 강하게 받았다.

작년에는 사성암에서 탱화를 그리는 스님을 뵈려 왔었고 올해는 이 절에 있는 3매 즉 자장매, 영취매, 오향매를 친근하려 친구 부부와 함께 올라왔다.


대웅전 앞마당 건너 거의 정면에 있는 오향매는 늙어서인지 세파에 시달려서인지 사지가 성한 곳이 없다.

대웅전에 모셔놓은 석가의 진신사리 기를 가장 가까이서 받았을 터인데 왜 이럴까?

화려한 분장을 한 홍매(자장매)와 영취매(분홍매)만 사랑하는 중생들이 미워서 법의를 스스로 벗어 버렸나?

다른 매와 달리 아직 꽃 기별도 없다.

잘러나간 사지에 새로 돋은 햇가지에 꽃 봉오리도 보이지 않는다. 꽃이 제대로 피기나 하려나? 걱정이다.

부디 다음날 올 때는 오향을 맡아볼 수 있기를 합장으로 기원하며 발길을 돌린다.


인근 영취매 역시 화려한 자장매에 손님을 대부분 빼앗기고 다소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영취매는 지금이 탐매 적기인 것 같다. 7,80% 정도 개화가 되었다. 은은한 향을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본전으로 쉼 없이 날려 보내고 있다. 가까이서 바라보는 것보다 조금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니 자태가 너무 단아하다.

마치 아침 일찍 곱게 머리를 단장하고 나와 앉은 새색시 얼굴 같다. 이번 탐매 중 가슴에 새겨 둘 연인으로 이 영취매를 미리 자정해 버렸다.


자장(자장율사) 매는 홍매다.

홍매는 언제 보아도 화려하다.

통도사의 자장매를 보는 순간 3년 전

화엄사에서 본 흑매가 머릿속을 갑자기 스치고 지나갔다.

이곳 자장매가 화엄사 흑매를 따라잡기 위해 수 십 년을 더 수행하고 나면 과연 따라잡을 수 있을까?

괜히 궁금해진다.

어쩌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지금의

이 사찰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다만, 더 두고 보자.

통도사 자장매 화엄사 흑매


내일은 내 고향 김해농고 교정에 있는 와룡매를 보려 갑니다.


20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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