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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 경덕 Oct 13. 2023

발칸기행 5

발칸기행 5

발칸 5일 차:

마케도니아의 오흐리드에서 그리스의

베르기나 - 데살로니키까지


자유여행은 언제든지 일정을 변경할 수가 있다.  

이것이 자유여행의 또 다른 묘미다. 당초 계획은 O'hrid에서 국경을 넘어 알바니아, 몬테네그로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게 되어있었다.

이 두나라는 이태리 동쪽 아드리아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다. 사회주의 체제를 벗어나 EU에 가입한 후

새로운 관광 휴양지로 각광을 받고 있는 나라들이다.

3일을 운전하고  나니 아무래도 무리가 뒤따른다. 함께한 동료들과 긴급 의총을 소집한 후 기수를 남으로 돌리기로 결정했다.

남은 4일 동안을 그리스의  데살로니키로 내려가 내친김에 아테네까지 점령해 보기로 작전계획을 다시 수립했다.


오흐리드를 떠나 산악지대를 30여분 달리니 과수원이 끝없이 펼쳐지는 평원이 나타나고 1시간을 더 달리니 마케도니아-그리스 국경이다. 그리스가 EU국가이고 친숙한 이름이라 그런지 입국하는 기분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국경을 지나 잘 닦인 고속도로 대신 시골길을 택했다.  구릉과 평원 사이로 난 시골길이 한적하고 무척이나 평화롭다. 바다와 섬과 산으로만 알고 있던 그리스에도 이렇게 넓은 대평원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베르기나는 남쪽의 높은 산을 등지고 앞으로는 완만한 북사면이 끝없이 넓게 펼쳐지는 비옥한 평야지대 경계지점에 자리 잡은 소도시다. 여기는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이 이곳에 왕궁을 짓고 살다가 죽은 곳이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의 고향이다.


"필리포스 2세 전까지 마케도니아는 남쪽의 그리스인들이 도시 국가로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 코린토스 등등) 큰 문명 발전을 이루는 동안 별다른 도시도 없고 지방 호족들의 세력이 강한 후진적 왕국으로 남았었다. 그래서 같은 그리스어를 쓰고, 같은 그리스 종교를 믿은 그리스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케도니아는 남쪽의 그리스인들에게 '반 야만' 취급을 받았다. 필리포스 2세 본인도 왕자 시절에 남쪽 그리스의 도시국가 테베에 인질로 가 있기도 했다.


아들 알렉산드로스에 가려져서 그렇지 필리포스 2세도 출중한 능력을 가진 왕이었는데, 그 이전까지 지방 호족세력들로 분열된 왕국을 통합하고, 기원전 338년에는 마케도니아가 강성해지는 데 불안을 느낀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을 중부 그리스의 카이로네아에서 격파함으로써 그리스 전체의 패권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금은광 산지인 그리스 북부의 판가이온 산을 점령해 확보한 것이 도움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 찍어낸 돈으로 그리스 최초로 상비군을 육성하고, 군사 장비상의 혁신도 이루었을뿐더러 (보병에게 길이 4-6미터의 장창 도입하여 기존의 밀집대형 전술을 발전시킴), 그리스 도시국가 지도자들을  매수하기도 했다.


필리포스 2세는 자신의 발아래 들어온 그리스 전역을 페르시아 제국 정벌을 위한 동맹에 가입하게 하고,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다가 그만 46세의 나이로 피살되고 말았다.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신속히 승계하여 부왕의 유업을 이어받아 페르시아 정벌에 나서게 된 것이  바로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이다. 왜 페르시아를 정벌하려 했을까? 명분은 기원전 5세기초 두 차례에 걸쳐 있었던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에 대한 복수라는 것이 정설이다.


필리포스 2세는 대낮에 극장 (이곳도 발굴되었음)에 입장하다가 모두가 보는 앞에서 경호원에게 살해당했는데, 그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본 것이 당시 아버지 눈 밖에 나 있었던 알렉산드로스였기 때문에, 알렉산드로스나 그의 어머니 올림피아가 배후라는 주장이 고대로부터 제기되었다. 그러나 단지 알렉산드로스가 득을 봤다는 것만으로 부친시해의 죄목을 씌우기는 어렵다는 해석 또한 고대로부터 말해져 왔다.

알렉산더와 그 어머니 올림피아가 당시 찬밥이었던 것은 올림피아가 외국 출신 공주여서 세력이 미약했던 데 비해, 필리포스 2세가 새로 왕비로 들인 여성이 마케도니아의 유력 귀족가문 출신이었는 데다가 이 새 왕비가 아들을 낳아버렸기 때문이다. (마케도니아 왕가의 중혼 풍습은 일부일처 문화인 기타 그리스인들에게 마케도니아가 야만으로 취급받는 이유 중 하나였음)


그러다 1977년 베르기나에서 마케도니아 왕가의 고분군이 발굴되었고, 특히 능묘 2호가 필리포스 2세의 것으로 추정되어 큰 관심을 받았는데, 문제는 지석이 나왔다던가 하는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것. 대체로 그리스 학자들이 이 능묘 2호를 펠리포스 2세 것으로 믿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 것 같다는 것이 학계의 의견이다. 그들이 내세우는 증거로는 첫째, 황금 유골함에 들어있었던 유골이 사십 대 남성의 것이며, 유골에 전쟁 중에 입은 것 같은 상처들이 보인다. 둘째, 2호 능묘에 40대 남성 유골뿐 아니라 다른 2-30대 젊은 여성의 유골도 함께 매장되었는데, 이 여성이 바로 필리포스 2세 사후에 알렉산드로스의 모친 올림피아에 의해 목숨을 잃은 필리포스 2세의 마지막 왕비의 것으로 보인다. (어린 아들도 함께 죽음)  그리고 그 밖의 기타 증거로는 무덤 벽화에서 '말등에 올라 창을 쥐고 사냥하는 젊은 남성'이 청년 알렉산드로스로 보인다는 점과 출토된 두 점의 작은 상아 두상이 중년 남성과 청년 남성이 것이다 등등이 있다."


어찌 되었든 필리포스 2세는 알렉산드로스에 버금가는 그리스사 영웅이라 그로 추정되는 무덤 발굴은 20세기 그리스 고고학의 중요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나는 경주 천마총이 연상되면서 능묘 안으로 들어갔다. 생각보다 크고 넓고 깊은 능묘였다. 그리고 발굴된 부장품들이 같이 전시되어 있는데 유골함의 경우 금박으로 한 것이 아니라 아예 황금덩어리 자체라고 하니 입이 떡 벌어졌다.  


베르기나에서 데살로니키까지는 고속도로를 타고 30여 분 만에 그리스 제2의 도시 데살로니키에 도착했다.

여기도 고대도시라 주차난이 극심하다. 도로변에 주차하고 ParkPal로 주차료를 선 지불한 후 숙소에 들어가 짐을 풀었다. 해변에서 가까운 구도심이라 바로 해변으로 나가 공원산책하고 선셋 크루즈를 했다. 석양에 지중해를 항해하며 마시는 맥주 한 잔이 아주 그만이었다. 그리스에서의 첫밤이 이렇게 시작되었다.


P.S

 이곳의 역사자료는 이번 여행에    함께한 인철 씨 부부의 딸이 영국에서 긴급하게 보내준 자료를 그대로 인용하였다. 영채는 옥스퍼드에서 로마사를 전공한 후 Ph D를 받고 지금도 옥스퍼드에서 연구 중이다.


  2023, 10,  12

  그리스 데살로니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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