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4년생이신 우리 엄마의 호적상 이름은 '순이'다. 출생 후 외조부로부터 정식으로 지음 받은 이름은 '일순'이라고 하셨다. 집안에서는 약칭으로 '순이'라고 통상 불렸다고 한다. 식민지 초기 시절 전국의 호적을 재 정비하는 시기가 있었다. 글을 해득할 수 있는 마을 친척 어른이 대신하여 호적 신고를 해 주실 때 면사무소 담당자가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약칭인 '순이'만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순이라고 대답하였고 그래서 호적명이 순이가 되어 버렸다.
암울하고 대부분 문맹이었던 그 시절에 일어난 웃지 못할 난센스이다. 비록 호적에는 '순이'로 등재되어 있더라도 일반적인 통칭은 항상 '일순'이라는 본명을 사용하기를 고집하셨다. 우리 엄마가 살아생전 가장 좋아하였던 호칭은 '이일순 권사'다.
당시 고향땅에서 비슷한 또래 엄마들 사이의 엄마 별칭은 '모래동 때기'다. 지금은 그 풍습이 사라졌지만 지난날 남녘 지방에서는 여자가 시집을 오면 자신의 출신 지명이나 마을 이름을 앞에 놓고 뒤에 때기를 붙였다. 때기는 땅을 일컫는 남녘 사투리다. 남쪽 지방에서는 딱지치기를 때기치기, 논 자락을 논 때기, 밭자락을 밭 때기라고 하였다.
친구 엄마들은 공촌 때기, 기장 때기, 산성 때기, 북섬 때기, 증산 때기, 주중 때기, 동래 때기, 배내꼴 때기 등으로 불렀다.
그런데 다른 엄마들의 별칭은 지역이나 마을 이름이 분명한데 우리 엄마는 그 이름 자체가 불분명하였다.
모래동은 모래가 쌓인 언덕이라는 뜻이다. 철이 들기 전에 하도 궁금해서 모래동이 어디 있는 동네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모래동은 지금 양산시에 속해있는 경부선 물금역 인근에 있는 증산마을의 옛 지명이다. 양산천이 낙동강 본류와 만나면서 상류에서 흘러 내려온 토사와 모래가 오랫동안 쌓여 모래등이 형성되었다. 그래서 그 엿날 여기에 마을이 들어섰는데 이 마을 이름이 모래동이다. 그런데 1900년도 초반 이 자리에 경부선이 지나가게 되면서 마을 일부가 산 쪽으로 물러나게 되었고 당시 행정개편을 하면서 한자음을 따 모래가 쌓여 생긴 '증'에다 뫼'산'자을 합해 '증산' 마을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모래동은 증산 마을의 순수 고유 지명이었다.
같은 마을에 사신 비슷한 또래의 친구 어머니는 증산 때기라고 하였는데 우리 엄마는 왜 옛 이름인 모래 등때기를 고수하셨을까?
지금 생각하니 모래동 때기가 증산 때기보다 훨씬 살갑고 정감이 가는 엄마의 별칭이었다.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도 비슷한 경우다.
태어난 마을의 행정명은 새 '조'에 말 더듬을 '눌'의
합자인 '조눌리'이다.
그러나 옛 지명은 '새너리'다.
수많은 철새가 날아와 쉬었다가는 들판이란 뜻이다.
나도 엄마를 닮아서 소싯적 누가 어느 마을에 사느냐고 물어오면 항상 새너 리에 산다고 대답하였다.
피는 못 속이나 보다.
어머니는 불행하게도 일찍 외 할머니를 여의셨다.
새로 들어온 할머니의 눈에 가시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진척집을 전전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셨기 때문에 학교는 문턱에도 가보지 못하였다고 하셨다.
그래서 문맹이시다. 글을 쓰고 읽지는못하셨지만 교회에 가시면 찬송가를 펼쳐 놓으시고 끝까지 정확하게 따라부르시는 독특한 능력을 지니고 계셨다.
'엄마, 글 읽을 줄 알아?'
어느 날 생각 없이 불쑥 물어보았다.
'찬송가만'
성경은 읽고 싶기는 하지만 읽기가 힘들어서포기하셨다고 하였다. 교회에서 대중기도 순서를 맡으시거나 가끔 가족을 위한 기도를 하시곤 하셨다. 누구보다 낭랑한 목소리로 은혜스러운 간구를 하셨다.
글도 모르시는데 참 묘한 능력을 지니고 계셨다. 음치이면서 가사만 기억하는 능력을 본인이 조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마도 그것은 어머니로부터 내가 물려받은 것 같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