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댐
7월 초순에 발표한 일기예보는 금년 장마는 예년보다 짧아서 일찍 끝날 것이라고 했다. 연일 폭염이 이어졌다. 피서도 할 겸 겸사겸사로 2차 공사까지 한 후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는 평화의 댐을 다시 찾아 가 보기로 하였다. 일기예보와는 반대로 물러갈 것이라는 장마전선이 7월 중순에 다시 한반도에 강하게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떠나기로 작정한 날 새벽에 하늘을 보니 동서남북 사방이 잔뜩 찌푸려 있었다. 금방이라도 한바탕 분탕질을 할 것 같은 기세였다.
매사에 소심한 아내가 베란다를 왔다 갔다 하며 걱정지수를 계속 높인다. 이런 날은 밖에 나가면 더 멋진 자연 풍광을 볼 수 있다고 연막탄을 뿌려 안심을 시킨 후 서둘러 집을 나셨다.
출발하자마자 비가 오락가락했다. 햇살이 없어 눈이 부시지 않아 오히려 운전하기는 편했다. 단숨에 춘천을 건너뛰어 화천 읍내에 들어서니 너무 서두른 탓에 아직 정오 전이다. 화천의 명물이라는 민물 매운탕집에 들어가 오랜만에 쏘가리 매운탕으로 이른 점심을 먹고 도착한 곳이 바로 오늘의 목적지 '평화의 댐'이다.
86 아세안 게임을 무사히 치르고 난 직후니까 벌써 40여 년 전이다.
북한이 내금강 즉 북한강 최상류 지역에다 금강산댐(임하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는 뉴스가 메스콤을 타기 시작했다. 댐 규모가 다소 오락가락은 하였으나 당시 발표로는 저수 용량이 무려 200억 톤 이상이 될 것이라는 추정치를 내놓았다. 남한 최대 규모의 소양강댐의 저수용량은 건설 당시에 25억 톤에 불과했다.
추정치가 맞다면 정말 어마어마한 규모다.
내금강 지역은 대도시나 공업단지 특히 대단위 농경지가 없기 때문에 이 댐 건설은 수력발전용 이라기보다는 서울을 수공으로 초토화시킬 목적이라는 추측에 무게가 더 실렸다.
당시는 86 민주화 투쟁 직후인 전두환 정권시절이라 정부의 신뢰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북한의 금강산댐 건설과 서울 안보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고 일반인들은 반신반의하였다.
그러나 이 댐을 완공한 후 만수위 때 고의적으로 댐을 폭파시키면 그 여파로 한강 상류의 여러 댐들 즉 화천댐, 춘천댐, 의암댐, 청평댐 그리고 팔당댐이 연쇄적으로 무너질 수 있다는 예상을 하였다.
이 여파로 엄청난 물 폭탄이 서울의 대부분 지역은 물속에 잠기게 되고 여의도는 무려 15m 수중에 잠길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정부가 바닥에 떨어진 민심을 회복시키고 국민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과장된 왜곡 선전 부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당시 정부의 당면 과제는 88 올림픽의 안전한 개최였다. 여기다가 국가의 장기 국토 안보론이 가세하여 이 댐의 하류인 화천 동북방 지역에다 수공 방어용 건류댐을 건설하기로 서둘러 결정을 하였다.
그 이름이 바로 '평화의 댐'이다.
국민호응과 관심을 유도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국민 모금 운동이 전개되었다.
당시 본인은 86과 88 올림픽의 편의시설 한 부분을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모금 운동이 시작되자 어쩔 수없이 모금을 독려하는 설명이나 강연회에 나가 마이크를 잡아야만 했다.
무엇보다 88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싶다는 의욕이 앞서 있었기 때문에 이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밖에 없었고 여기다가 고등학교는 공고를 다니면서 선택한 전공이 묘하게도 댐과 직접 연관이 있는 토목이었다. 깊지 않은 토목 기술 지식이었지만 당시 이 댐에 관련되어 발표된 정보와 본인의 토목 지식이 서로 맞부딪쳐 제법 강한 심적 갈등이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내색하지 않고 모금 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서서 열심히 참여하였다.
모금도 속전속결, 공사도 속전속결로 추진되었다. 88년 올림픽 직 전에 1차 공사가 끝난 것으로 기억을 하고 있다. 마침 이 공사 현장에는 가까운 친구가 직접 관여하고 있었다. 제법 정확한 정보와 공사 진척상황을 알 수 있었다.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먼저 1차 준공된 현장을 무리해서 직접 찾아가 보았다.
화천에서부터 길 같지 않은 길을 더듬어서 악전고투 끝에 들어가 보니 이것은 댐이 아니었다.
마치 멧돼지가 분탕질을 해 놓은 것 같은 현장 모습이었다. 여기저기 파헤쳐져서 민낯을 들어낸 주변 법사면들, 아직도 바닥에 흩트려져 다 뒹구는 기자재들, 심지어 각종 중장비가 골짜기 여기저기에 방치되어 녹슬어 가고 있었다.
건류댐이라 물을 채워놓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모습이 더더욱 을씨년스러웠다. 일차로 준공된
댐의 높이는 80m, 폭이 200m였다. 그러나 내 눈에는 댐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물이 없는 건류댐이라 주변 험악한 산악 지세에 가려 더욱 초라하게 보였다.
한숨을 내시며, 내가 속았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속히 나의 뇌리에서 이 댐에 대한 모든 기억을 지워버리자고 내심 작정을 하였다.
하나 둘 기억을 지워가며 세월은 흘러갔다.
2000년대 초반 여름 어느 날 북한 측이 건설한 금강산댐의 수문을 사전 예고도 없이 갑자기 개방을 하였다.
1차로 건설해 놓은 평화의 댐이 다행히 이 물을 막아주어서 큰 피해는 입지 않고 지나갔다.
이 사건이 그동안 반신 반의 했던 이 댐의 건설 목적이 증명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놀란 정부가 방치해 놓다시피 한 이 댐의 2차 공사를 다시 서둘러 착공하였다. 오늘날 평화의 댐은 이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 모습을 다시 드러내게 된 것이다.
이 참에 최종 완공된 평화의 댐 규모와 북한의 임하댐 그리고 근처에 있는 소양강 댐의 규모를 참고로 비교해 보면
평화댐 금강산댐 소양강댐
높이 126m 121 123
폭 601m 700 530
저수량 26억 톤 35 29
지난 자료를 한번 찾아보았다. 2002년 여름 북한 금강산 지역에 폭우가 내렸다. 북한이 서둘러 조잡하게 건설한 금강산댐의 일부분에 침하가 일어났다.
이 때문에 북한이 급히 임하댐의 수문을 개방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였다.
악의적인 수공보다는 날림공사가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교훈을 이렇게 하여 알게 되었다.
다행히 이에 대한 우리 측에서 완벽한 대비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소 과장된 대비도 실제로 일어나는 작은 사고보다'는 났다는 교훈을 여기서도 우리는 얻을 수 있었다.
사실 북한 측은 금강산댐에서 전력을 생산하고 방류되는 물을 남측으로 흘러 보내지 않는다.
금강산에 터널을 뚫어 동해 쪽으로 흘려보내 이 낙차를 이용해 다시 전력을 생산한다. 이 때문에 평화의 댐
상류로부터 평소에는 물이 내려오지 않는다. 이로 인해 화천, 춘천 등 하류 지역의 수력전력 생산량이 많이 감소되었다.
유비무환이다.
특히 이상 기후에는--
요즈음 같이 기습적인 국지성 폭우가
예고 없이 내리면 피해 규모가 더더욱 켜진다.
자연의 위력은 때때로 우리의 상상이나 예상을 초월한다.
먼저 언급한 세 댐의 저수 용량에서 비교표에서 보듯이 이제는 어떤 경우에도 북한 측의 수공에 대한 우리 측의 대비가 가능하다.
그동안 북한 측 수공에 대한 염려,
우리 정부의 과장된 발표에 대한 회의,
그 가운데 이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자신의 갈등을 항상 가슴에 안고 살아왔다.
이번에 두 번째로 평회의 댐을 방문하고 난 후 이러한 의문과 회의를 완전히 해소시킬 수 있었다. 다행이다.
마음이 가볍다.
지금은 평화의 댐 주변이 너무 잘 정리되어 있다.
주변 산세의 풍광이 너무 좋아서 어느 관광지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특히 신록이 우거지는 봄철과 가을 단풍철에 꼭 이곳을 방문해 보시라고 강력하게 권하고 싶다.
2025, 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