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을 찾는 이유
우리는 때때로 꿈속에서 이상향을 그립니다.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 견디기 힘들 때일수록 이상향을 그리는 빈도가 많아집니다.
요즈음처럼 연일 맹폭하는 폭염도 이상향을 그리게 하는 요소 중 하나가 될 수 있겠네요.
가고 싶은 피서지를 상상하거나 직접 찾아 나서는 것도 가장 낮은 수준의 이상향을 향한 행동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이름난 명승지를 탐방하는 것과 유적지를 찾아가는 그 자체가 우리가 그리는 이상향을 구체화시켜 나가는 일종의 반복 학습 과정이 되겠네요.
그러나 우리가 어제도 마주쳤고 오늘도 마주쳐야 하는 지금 처해 있는 현실 세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습니다. 항상 제자리로 회귀하는 회귀 본능 때문입니다.
그리고는 독백합니다.
'내 집이 최고'라고.
막연히 그려지는 이상향 중에 가장 쉽게 떠오르는 장소는 뭐니 뭐니 해도 고향입니다. 어린 시절 동무들과 뛰어놀았던 산과 들 그리고 앞 뒷집 마당과 골목길입니다. 때론 방학 때 엄마 손에 이끌려 따라갔던 외갓집도 머릿속에 남아 있네요.
세월이 흘려 나이가 차니 떠나 온 고향 산천이 너무나 많이 변해 버렸습니다. 마음먹고 찾아갔지만 온통 시멘트 벽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어른들 몰래 들락거렸던 구멍가게는 편의점 간판 색깔만 요란합디다. 그래도 북에다 고향을 두고 떠나온, 가고 싶어도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났겠지요.
누구나 이상향을 향한 버릴 수 없는 열정을 마음속에 항상 숨겨 두고 있습니다. 가끔 몰래 꺼내 놓고 펼쳐 보기도 하지만 금방 접어 버립니다.
이제는 숨길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우면, 가고 싶으면,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니까요.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볼 수 있는 여유도 있습니다.
소싯적에는 꿈속에서 그렸던 부푼 희망들을 마음 놓고 푸른 하늘 속 흰 구름 위에다 그리면서 그 꿈을 키웠답니다.
아침저녁 배고픔을 참으며 등하굣길에 만난 넓은 벌판과 가을의 황금빛 들녘, 이제는 그 때깔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머릿속에 되살아 납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합니다.
어서 오라고,
와서 보고 가라고,
자꾸만 나를 유혹합니다.
더위가 아니라 정말 찜통이네요.
새벽부터 에어컨에 틀어놓고 더위를 피해 보지만 마음은 자꾸만 푸른 하늘을 날아오릅니다.
조갑증이 나네요.
짜증이 나기 시작하네요.
자꾸만 고향의 푸른 벌판들이 손짓을 합니다.
초복을 전후하여 무논에 엎드려 마지막
김 메기(망시)하던 삼촌들의 모습이 돼살아납니다.
더위를 피하지 않고 맞선 우리들의 아버지 그리고 삼촌들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아내와 서둘러 역으로 나갔습니다.
다행히 9시에 출발하는 장항선 열차를 탈 수 있었습니다.
'서해 금빛 열차' 이름을 보아하니 서해안 낙조를 테마로 한 관광 열차입니다.
아내의 고향인 충남 보령까지 가는 차표를 끓었습니다. 여기는 유명세를 탄 커다란 목간통(대천 해수욕장)이 있는 곳입니다. 열차가 예산을 벗어나고 나서야 드디어 푸른 벌판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중복 무렵 최고의 푸른 자태를 뽐내는 벼논 즉 무논입니다. 기차는 아내의 고향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지만 나는 내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먼 산에 오랜만에 뭉게구름이 솟아오릅니다.
그 속에 모습을 감추고 계신 하나님을 찾아보려고 눈을 고정시킵니다. 소싯적 소를 몰고 강가에 나가서 심심하면 팔배계를 하고 하늘의 흰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며 상상했던 지난날의 추억이 새롭게 되살아 났습니다.
동물은 기본적으로 회귀본능이 있습니다.
그중 인간이 제일 강한 회귀본능을 가졌습니다.
날이 차면 항상 집으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왜? 왜 그럴까요?
내일은 어디로 돌아갈까요?
본향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거기는 우리들의 궁극적인 이상향입니다.
사람들은 이상향을 찾아 나서기를 즐기면서도 궁극적인 본향에 돌아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다가는 억지로 떠밀려 본향으로 가는 가엾은 신세가 됩니다.
오늘 찾아온 아내의 고향에서 본향의 색깔을 더듬어 그려 봅니다. 그리고 내가 찾아갈 마지막 본향이 제발 붉은 색깔이 아니기를 기원을 해 봅니다.
이렇게 푸른 벌판과 맑고 더 높은 하늘 그리고 피어오르는 희망의 뭉게구름 여기에 더 하여 끝없이 노래하는 흰모래사장의 파도소리가 있는 본향을 여기서 미리 경험합니다.
이상향은, 고향은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만들어 가야 하는 곳임을 오늘 뒤늦게 깨닫고 돌아갑니다.
2025,7,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