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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늦게 샹젤리제 뒷골목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규모도 작고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생각보다 아늑하고 잠자리가 편안했다.
두 사람 아침까지 포함하여, 구라파 호텔은 아침이 포함되어 있음, USD로 환산하니 하룻밤에
38불 정도 되었다.
어젯밤, 진눈깨비 속을 헤매면서 예약 없이 찾아갔었던 대형 호텔의 엄청난 숙박비, 놀라서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등을 돌렸던 일들이 눈을 뜨니 주마등처럼 떠 올라왔다.
'선진국을 여행할 땐 필히 사전에 예약을 하고 떠날 것'이라고 당시 갖고 다녔던 수첩에 또렷하게
아직도 적혀 있다.
눈을 감고 오늘 해야 할 일을 궁리하고 있으려니 아래층에서 커피 향이 진하게 스며들며 올라와
식욕을 돋워며 하루를 재촉하고 있었다.
창 밖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맑은 아침 햇살은 우리들의 파리의 첫날을 기분 좋게 맞이해
주고 있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박 2일뿐, 어디 가서 무얼 구경하지?
취소된 일정 때문에 갑자기 이곳에 들어왔기 때문에 첫날부터 어디 가서 뭘 봐야 할지가
막막하기만 했다.
파리하면 보통 사람들은 에펠탑, 베르사유 궁전, 루블 박물관. 센 강 등등이 생각 날 텐데 네
머릿속에서는 '물랭루주 쇼'가 제일 먼저 떠 올랐다.
아침에 지하철로 서둘러 찾아간 곳은 머문 호텔에서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던 물랭루주
공연장이었다. 그러나 예약 없는 당일 공연 관람은 불가능했다.
공연장 외벽에 설치해 놓은 커다란 풍차만 한참 바라보다 풍차처럼 다시 제자리에 돌아가야만 했다.
아쉬워하면서 발길을 돌리려고 하는데 눈치를 챈 어느 미국 관광객이 한 마디 조언을 해준다.
이와 비슷한 쇼를 샹젤리제에서도 공연을 하고 있으니 한 번 가보라고 했다.
이름은 '리도 쇼' ,
다시 택시로 "샹젤리제 라피도 "
이제는 빨리 가자는 소리를 불어로도 할 줄 아는 여유마저 생겼다.
리도 쇼 공연장은 머무르고 있던 호텔에서 걸어서도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60불/인, 두 사람 120불, 하루에 100 불 정도 지출 예산을 잡고 떠난 여행이었으니 당시로는 큰돈이었다.
오늘 저녁에 할 큰일을 일찌감치 결정했으니 이제는 뭘 하던 자유다.
지하철로 먼저 파리 방문 기념 도장을 찍기 위해 에펠탑을 찾아갔다.
그런데 지하철 정류장에서 구걸하는 집시 한 가족을 만났다.
아기를 업은 엄마. 10살 전후의 어린이 둘에다, 6,7살 꼬마 하나,
이들은 한 팀을 이루어 연약해 보이는 듯한 아내를 보자마자 빙 둘러싸고서는 사정없이 몸이나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아내는 비명을 질렸지만 지나가는 사람 어느 누구 하나 관심을 기울이거나 관여하려 들지 않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지나갔다.
'이에는 이, 칼에는 칼이다.' 상황이 심상 않다고 판단한 나는 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있던 이들을
한 명씩 완전 폭력으로만 제압하며 때어 놓았다.
정말 위험한 행동이었고 아찔한 순간이었다.
다행히 지니고 다녔던 물건이 많지 않아서였던지 빼앗긴 물건이나 돈은 없었다.
오후에는 루블 박물관을 관람하였고 석양에는 두 사람이 오랜만에 손을 꼭 잡고서는 젊은 파리 쟝
흉내를 내면서 몽마르트르 언덕을 올라갔다.
내려올 때 바라본 먼 지평선에 펼쳐진 파리의 석양은 정말 잊지 못할 일품이었다.
이제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리도 쇼만 남아있다.
디너쇼 니까 저녁을 염려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은 우리나라도 개방이 되어서 외국의 선진 문화 문물을 많이 접할 수 있지만 당시 일반인들에게는
이런 기회가 전무하다시피 했다.
웅장한 쇼 무대와 화려한 장식 여기에 더한 현란한 조명, 숨 돌릴 틈도 없이
변화하는 스테이지, 등단하는 초 일류 팔등신 무희들의 춤과 각선미, 정말 혼 쑥 빼놓고도 아니
스테이지마다 혼이란 혼은 모두 다 빼놓고는 사라지곤 했다.
사실 각선미보다는 상반신을 노출한 톱 프레스 무희들의 가슴이 더 일품이었다.
넋을 놓고 바라보다 몇 번이나 아내에게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렇게 무능 도원을 거닐면서 파리의 두 번째 밤은 보내고 나니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이 밝아왔다.
오전은 베르사유 궁전을 가기로 했는데 거리도 있고 접근하는 교통 편도 만만치가 않았다.
대신 본인보다는 교양 상식이 풍부한 아내의 청을 받아들여서 세느 강변에 자리 잡고 있는 '오르세'
미술관을 찾아가기로 했다.
옛 날 역사 자리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완성이 되지 않아 조금은 어수선했지만 인상파 작가들의
작품들을 여기에 다 모아 놓은 것 같았다.
파리 여행 시 빠뜨리기 쉬운 장소인데 누구에게나 꼭 방문해보라고 권하고 싶은 장소이다.
오후에는 일찌감치 다시 스위스로 가기 위해 서둘러 동부 역으로 나갔다.
취리히행 열차표를 사고 나니 또다시 2시간 정도의 여유가 남아 있었다.
동부 역사를 빠져나와 골목으로 들어가니 고만고만한 작은 레스토랑에서
하나같이 생굴을 대바구니에 담아 밖에 진열해 놓고서는 손님을 유혹하고 있었다.
미식가들이 놓칠 수 없는 파리에서의 두 가지 음식은 와인과 생굴 요리인데,,,,,,,,,
눈치를 알아차린 아내는 자꾸만 옷소매를 잡아끌며 역사로 돌아가잔다.
어느 집을 골라 무턱대고 들어갔다.
잘 통하지 않는 불어로 생굴 한 바구니를 주문하고 나니 세프인듯한 주방장이 옆구리에 와인 한 병을
끼고 나타났다.
"Yes, Sir!"
와인의 라벨을 보여주며 빈티지를 뭐라고 불어로 설명을 했다.
"논 "
조금 있다 다른 병을 들고 와서는 똑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논 "
세 번째로 또 다른 병을 끼고 나타났다.
내 자존심은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위 "
보는 자리에서 정성스레 와인병 마개를 따고서는 반 바퀴 돌려 코르크 마개 아래에 인쇄된 빈티지를
코앞에 들이밀며 보여 주었다.
얼른 보니 몇십 년은 된듯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와인 한 병을 거의 혼자서 다 비우고 계산서를 받아보니
"아 불사!"
와인 한 병과 생굴 한 접시에 하루의 예정된 일당이 모두 다 날아가 버렸다.
"여보? "
"우리 로마 가서 하루만 금식하자!"
2016년 1월 27일
-로마 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