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이 진부한가요?
2020년과 2021년 두 해는 시간의 마디가 띄엄띄엄 몇 개 없는 것 같다. 나의 기억의 마디가 별로 없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런 건가. 찬바람이 부는 늦가을이 시작되자 두 해나 지난 기억과 불편한 감정이 마치 얼마 안 된 일처럼 불쑥불쑥 올라와 나의 마음을 어지럽혔다.
불쑥 기억났던 그 일은 늦은 가을 이곳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다. 언젠가부터 감정의 골이 조금씩 파이고 파이다가 더 깊게 내리꽂았던 최악의 순간을 나는 그날 마주했다. 그래서 늦은 가을의 그날 밤이 되면 그 순간을 이 공간에서 다시 맞닥트린다. 카페 문을 나서면서 재차 반복하던 말까지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넌더리가 난다. 왜 아직도 마음에 콕 박혀있는 건지.
그날 이후로 누군가에게 그때의 복잡한 상황과 감정(한참을 지나 모멸감이라 정의된)을 토로하고 싶었던 마음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고 마음을 감춰둔 채 시간은 흘러갔다. '할많하않'(이것이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이것이 최선이니, 마음 안에서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한동안 괜찮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지만 늦가을이 돌아오자 그때의 불편한 기억이 다시 떠오르는 건 당황스러운 일이다.
불쑥 떠오를 때마다 모른 척 생각을 끊어버리고, 전혀 다른 생각으로 덮으며 지내던 늦가을의 끝무렵. 그 사람이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을 갑작스럽게 들었다. 듣자마자 나는 재차 확인했다. 갑자기 저 밑에 깔려 있었던 혼재된 마음들이 울컥 솟구치며 게워내듯이 올라온다. 소식을 듣고 난 이후부터 마음이 괜스레 조급해지면서 딱 한마디만 해주고 싶은 욕망이 불쑥불쑥 치솟는다. 혼자서 상황극을 해본다. ‘대면해서 조용히 귓속말로 하는 거야. 딱. 한마디만 하자.’
“ 야 이 개새끼야... 잘 가. "
하지만 허공에 대고 혼자 하는 것은 마음이 그다지 풀리지 않는다. 여전히 왜 이러는 걸까? 아직도 뒷북을 치며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내가 지겹다. 상황은 모두 종료됐는데 마음속에서 삭제가 안됐다. 유한한 시간의 기억이 무한한 계절의 기억으로 돌아와 나를 괴롭힌다.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뒷목이 뻐근해진다.
자리를 옮긴다는 소식을 들은 후 지난 그날들이 더 낱낱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때의 일기를 다시 끄집어내어 읽지 말아야 했다. 역류해서 올라오는 마음을 꾹꾹 누르며 며칠을 지내다 한 친구를 3년 만에 찾아갔다. 이 이야기를 하려고 갔던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이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던 그 친구 입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 툭 하고 튀어나왔다.
“개새끼네...”
이 말을 듣자마자 내 속에서 역류하던 무엇이 멈췄다. 그러더니 마음 밑바닥 한구석에 꽁꽁 얼어붙어 고여 있던 무언가가 뜨거운 햇빛을 내리쬔 눈처럼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졌다. '이게 무슨 일이지...'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나는 그제 서야 알았다. 어떤 판단도 위로도 나에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온전한 공감..’ 친구의 한마디에 이렇게 쉽게 끝날 일이었다.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일 뿐이라고 나의 머리는 나의 마음에 말할지라도, 사람의 어떤 말은 마음으로 바로 날아와 쿡하고 박혀서 오래도록 남는다. 인생에서 계속 꺼내보고 싶은 말이 아니라면 얼마나 괴로운 일일까.
최악의 순간이 있던 그날 밤. 그 상황의 감정을 문장으로 정리해 보려 했지만 어떤 문장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방에 불이 꺼진 채로 새벽 네시가 넘어서까지 잠에 들지 못했다. 그때 나는 어떤 마음 때문인지 이상하리만치 말을 아끼고 거의 동요하지 않는 모습으로 상대의 말들을 들었는데, 제대로? 되받아치며 반응하지 않은 것이 내 마음의 독이 되었다.
지나 보니 내 인생에서 나의 말이 어쩌면 어떤 상대에게 그랬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만약 그것이 나는 생각조차 나지 않는 말이라면 소름이 끼친다. 정말 미안하고 미안하다. 그러니 시간이 더 흐른 지금. 그때 제대로 후련하게 반응하지 않아서 상대에게 독이 되지 않고 나에게 독이 되었던 것은 오히려 다행한 일일까.
친구가 툭하고 내뱉은 한마디 만으로 나는 그 기억의 감정에서 완벽히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마음의 재활이 가능해진다. 하나씩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나의 마음이 점점 누그러졌나 보다. 늦은 밤까지 한참을 듣던 친구가 뜸 들이며 말을 꺼냈다.
“근데 몇 년 전에 너 여기 와서.. 그 사람 칭찬 많이 했던 거 기억나...?”
“어. 그랬지...”
사실 그 최악의 사건이 있었던 공간이, 가장 좋았던 첫 대면이 있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망각되지 않았던 모든 것이 상쇄되었다. 단절되어 고여 있던 시간들이 내 마음을 통과하여 이제 어디론가 흘러간다.
“잘 가라.”
흘려보낼 건 보내고 나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행복해지려면.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급격하게 극적으로 변화할 때가 있다. 지금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닌 게 되어버렸다. 이러면서 마음은 더 단단해지는 걸까. 2022년 새해로 가는 얼마 남지 않은 길목에서 어른에 쪼끔 더 가까워진 것 같기도 하다. 내년에도 점점 더 단단해져서 나아가는 우리의 삶이 되길.
내 곁에 있는 그대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