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 전야의 고요

첫 번째 임신과 유산 5

by 황경진

한국에 들어온 때가 우연히 추석과 겹쳐 오랜만에 가족과 명절을 보낼 수 있었다. 마침 그해부터 큰집에서 지내던 차례가 없어져 엄마는 처음으로 명절 음식에서 해방되었고, 언니네 가족도 시댁에 양해를 구하고 연휴가 시작되자마자 친정으로 내려왔다. 네 가족이 다 같이 모여 명절을 보내는 게 실로 오랜만이었다. 불행 중 마주친 행복이랄까. 안 좋은 일 덕분에 좋은 일도 생겼다.

추석 당일 아침, 할 일 없는 며느리 셋(엄마와 언니와 나)은 오붓하게 여자들끼리 외출을 했다. 금오산 입구에 있는 예쁜 카페에서 우아하게 커피를 마시고 케이크를 먹었다. 대부분 차례 지낼 시간이라 넓은 카페는 텅 비어 있었고 우리는 탁 트인 창문 옆에 자리를 잡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했다. 예쁜 가을날이었다. 명절에 며느리의 역할을 두고 엄마와 언니가 투닥거리기도 했지만 그런 이야기마저 좋았다. 다시 못 올 시간인데 셋이서 사진 한 장 찍지 못한 게 지금에와서 아쉽다.

연휴는 평온하게 흘러갔다. 조카를 데리고 금오산 호수에서 오리배를 타고, 팥빙수를 먹고, 자연학습원을 산책하고, 밥을 해 먹거나 사 먹기도 하면서. 그 시간 동안에는 별로 슬프지도, 앞으로의 일이 걱정되지도 않았다. 가족 덕분에 폭풍 전야의 고요를 온전히 즐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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