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임신과 유산 4
처음부터 한국에 갈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피가 쏟아지고 난 직후에는 장시간 비행이 엄두가 나지 않았고, 컨디션이 조금 회복되었을 무렵에는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한국에 갈 순 없으니 어떡해서든 여기서 해결해보자는 마인드였다. 하지만 더 이상 진료를 미룰 수 없었다. 마침 비수기라 당일 비행기에도 자리가 많았고 미국 응급실 한번 다녀오는 것보다도 값이 저렴했다. 급하게 표를 예약하고 부모님께 알렸다. 한국 가는 일이 이렇게 쉽고 간단한 일이었다니!
그렇게 수요일 밤 11시 30분에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고 12시간을 날아 금요일 새벽 4시경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첫 공항열차를 타고 서울역으로 간 후 다시 기차를 타고 나의 고향이자 부모님이 계신 구미로 내려갔다. 20시간에 걸친 여행에 기진맥진했지만 우리 엄마는 나의 몰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부터는 단 1분도 허비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내 손을 잡아끌고 동네 산부인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나는 너무나도 선명한 고화질 화면을 통해 처음으로 내 뱃속의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핏덩어리 속에 섞여 나왔을 거라고 생각했던 아기집은 아직 자궁 내벽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그 속에 작디작지만 뚜렷하게 보이는 배아가 심장이 멈춘 채로 죽어 있었다. 초음파라는 게 이렇게 잘 보이는 것이었구나, 산타페에서 내가 본 화면은 도대체 뭐였을까 하는 충격도 잠시, 가만히 죽어 있는 배아의 모습에 갑자기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유산되었습니다, "라는 말을 듣는 것과 유산이 된 장면을 직접 확인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존재했고, 그동안 병원을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제대로 들춰볼 여유가 없었던 복잡다단한 감정이 화면을 보는 순간 북받쳐 올랐던 것 같다. 막 피어나려 했던 생명이 얼마 가지도 못한 채 꺼져버린 모습이 애틋하고 애달팠다. 잠깐 본 장면이었지만 앞으로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 잊지 못할 장면이 될 거라는 것도 알았다.
의사 선생님은 계류 유산으로 진단을 내리고 동네 병원보다는 큰 병원에서 시술받기를 권했다.
우리 엄마는 훌쩍이는 내 손을 다시 잡아끌고 차병원으로 데려갔다. 차병원은 미리 예약할 수는 없었지만 당일 진료라는 감사한 시스템이 있었다. 먼저 오는 대로 번호표를 뽑아 대기하면 시간이 나는 대로 진료를 봐주었다.
운이 나쁘면 의사를 못 볼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한 시간도 안 되어 내 차례가 돌아왔다. 하루 만에 예약도 없이 의사를 두 번이나 만나고 초음파도 두 번이나 볼 수 있다니 한국의 스피디함에 진심으로 혀를 내둘렀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어려웠던 일이 한국에 오자마자 순조롭게 착착 진행되었고, 내가 신경 쓰지 않아도 알아서 나를 병원에 끌고 가 주는 엄마의 존재가 감사했다.
차병원의 의사 선생님도 계류 유산으로 진단을 내리고 가능한 한 빨리 중절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미국에서 병원을 찾아 헤매는 사이 아기집은 계속 자라고 있었고, 생각보다 깊숙히 자리 잡아 수술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했다. 2차 수술이 필요할 수 있다는 말에 조금 겁이 났지만 수술이 확정된 것만으로도 마음이 놓였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고 있어서 수술은 연휴가 끝난 뒤로 미뤄야 했지만 4일 더 기다리는 것쯤이야 아무렇지 않았다. 드디어 이 여정에 끝이 보였고 그제야 긴장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오후 4시경 나는 그로기 상태가 되어 그대로 뻗어버렸다. 저녁 먹고 자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꿈결 저 멀리 들려왔지만 눈꺼풀을 들어 올릴 힘이 없었다. 나는 침대와 물아일체가 되어 다음날 오전까지 여행한 시간만큼 긴 잠을 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