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임신과 유산 8
미국에 돌아온 후 뭐든 해보려고 애썼다. 계획했던 프로젝트와 작업할 글과 그림이 쌓여 있었지만 모든 게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보다 못한 남편이 불쑥 내민 해결책은 닌텐도 스위치였다. 시름을 잊는 데 이만한 게 없다며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편을 추천했다. 본인이 생각했을 때 이 게임은 죽기 전에 꼭 해봐야 하는 게임인데 지금이 딱 적기인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에 내가 어떻게 반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자포자기하고 그래 게임이라도 해보자, 했는지, 지금 이 상황에 게임을 하라고?! 했는지.
아무튼 남편은 본인 책상 위에 있던 모니터에 콘솔을 연결하고 완벽하게 자리를 세팅한 뒤 컨트롤러를 나에게 넘겼다. 나는 생전 처음 잡아보는 컨트롤러를 어색하게 손에 쥐고서 화면 앞에 앉았다.
내 게임 경력을 잠깐 소개하자면, 콘솔 게임은 일곱 살 때 옆집 사는 친구네서 슈퍼마리오 2D 게임을 잠깐 해본 게 다이고, 컴퓨터 게임은 윈도에 깔려 있는 지뢰찾기와 카드게임 정도가 전부다. 요즘 컨트롤러에는 무슨 버튼이 이렇게 많은지, 캐릭터를 움직이며 카메라를 조정한다는 개념 자체가 충격이었다.
컨트롤러 버튼을 만지작거리는 사이 인트로 영상이 시작되었고, “링크, 링크…” 주인공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게임의 제목이 젤다의 전설이라 주인공이 젤다인 줄 알았지만 주인공의 이름은 링크였고, 재앙 가논에게 붙잡힌 젤다 공주를 구해내는 게 미션이었다.
어찌어찌 시작은 했지만 게임에 이렇게 집중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하던 나에게 게임은 아주 명확한 디렉션을 제공해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예를 들면 언덕 아래 보이는 할아버지에게 가서 말을 거시오, 탑 위에 올라가 보시오, 붉게 빛나는 사당을 찾으시오, 와 같은 단순 명료한 지령이 시기적절하게 내려왔고, 그 지령에 따라 움직이면 재미있는 사건들이 끊임없이 펼쳐졌다.
방향감각은 둔하고 겁은 많고 순발력은 부족한 데다 컨트롤까지 어눌해서 초반에는 황당하게 죽기 일쑤였다. 떨어져 죽고, 물에 빠져 죽고, 얼어 죽고, 맞아 죽었다. 이래서 젤다 공주를 구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게임 설계가 아주 잘 되어 있어서 나 같은 왕초보자도 포기만 하지 않으면 스토리를 계속 따라갈 수 있었다. 특히 게임 안에는 게임에 필요한 여러 기술을 습득할 수 있는 사당이 120개나 있었는데 수수께끼 같은 미션을 클리어하고 나면 사당 안에 잠들어있던 신이 깨어나 "극복의 징표"란 것을 주었다. 그때마다 이런 대사가 나왔다. “시련을 극복하고 이곳에 도달한 자… 그대야말로 의심할 여지없는 용사…”
고블린 하나 나올 때마다 무서워서 도망 다니기 바쁜데 의심할 여지없는 용사라니 너무 웃겼다. 남편도 옆에서 큭큭대며 놀렸다. 하지만 게임 속의 링크는 의심할 여지없는 용사로써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고 나도 계속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두 달 넘게 게임만 했다. 게임 규모가 너무 커서 초보자인 나에게는 해도 해도 할 게 넘쳤다. 아침에 일어나서 잠들 때까지, 밥 먹고 씻고 가끔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는 게임만 했다. 개그우먼 김숙 씨가 한때 게임에 중독되어 살았다고 고백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정말 이해가 안 되었던 게 게임을 하다 보니 그 심정을 알 것 같았다.
게임을 시작한 때가 10월 중순이었는데 어느덧 12월 중순을 넘어가고 있었다. 스토리도 많이 진행되어 엔딩에 가까워지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이제 그만할 때가 되어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해에 들어서까지 하루 종일 게임만 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연말까지 젤다 공주를 구해내고 새해에는 게임 밖의 삶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두 달 내내 게임만 했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감이 둔해 여전히 서툰 게 많았다. 보스보다 강하다는 라이넬(반인반수)은 한 마리도 잡지 못했고 가디언(로봇)이 쏘는 레이저빔을 제대로 튕겨내지도 못했다. 하지만 나에게는 24시간 옆에서 대기하고 있는 숙련된 조교가 있었다. 남편은 위급한 순간에 언제든 나타나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해주었고 덕분에 새해가 오기 전 재앙 가논을 무찌르고 젤다 공주를 구해낼 수 있었다.
엔딩 장면을 보고 있자니 뿌듯함과 동시에 내가 뭐 때문에 이러고 있었을까 하는 허탈함이 몰려왔다. 게임을 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유산으로 겪었던 일들이 별 것 아닌 게 되어 있었고, 불안과 무기력증도 거의 자취를 감추고 없었다. (용사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너무 집중했던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유산 후유증을 극복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남편의 선견지명대로 링크와 젤다의 도움으로 무사히 일상으로 복귀했다.
젤다의 전설을 하면서 인생도 게임 같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단순 명료하게 알려 주는 전지적 시점의 누군가가 있고, 계속 실패해도 다시 할 수 있고, 종국에는 목표한 일을 이루게 되는 인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현실이 게임 같을 수는 없다. 정해진 길이라는 것도 없고 죽었다 다시 살아날 수도 없다. 결국엔 해내리라는 보장은 더더욱 없다.
하지만 막막한 순간에 스스로를 움직이게 하는 지령을 만들어낼 수는 있을 것 같았다. 2019년 새해가 밝은 후로도 가끔 무기력증이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게임 속의 캐릭터에게 하듯 최대한 단순하게 지령을 내린다. "지금 당장 침대에서 일어나시오!" "샤워를 하시오!" "문을 열고 나가 걸으시오!"와 같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사는 데 도움이 된다. 이게 두 달 동안 게임을 하며 얻어낸 나름의 교훈이라면 교훈이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