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일기, 그냥 노는 날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 나는 카페로 출근한다.
어떤 날은 천천히 걸어서, 어떤 날은 차를 몰고 조금 먼 곳으로 향한다.
길 위의 소음과 공기를 가르며 도착한 그곳에서, 하루가 시작된다.
진한 모닝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자리에 앉는다.
따뜻한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고, 코끝에 맴도는 향을 천천히 들이마신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귀에 닿는다.
묘하게도 커피 향 속에 그 음악이 함께 섞여 있는 듯하다.
나는 향을 마시는 건지, 음악을 마시는 건지 알 수 없는 채로
숨을 들이마시며, 이 조용한 시간을 천천히 음미한다.
그렇게 아침이라는 시간을 입 안 가득, 마음 한가득 채운다.
책을 꺼낸다.
어떤 날은 철학서를, 어떤 날은 소설 속 한 문장에 오래 머문다.
책장이 천천히 넘어간다.
지루해질 즈음이면 노트북을 펼쳐 글을 쓴다.
요즘 내가 쓰는 글은 부동산에 관한 분석이기도 하고,
철학적 단상이기도 하며, 이렇게 은퇴자의 하루를 기록하는 일기이기도 하다.
누군가를 설득할 필요도 없고, 뭔가를 증명하려 애쓸 이유도 없다.
그냥 떠오르는 대로, 느껴지는 대로 쓴다.
돈을 벌기 위한 것도 아니고, 보여주기 위한 것도 아니다.
글을 쓰다가 문장이 끊기면 다시 책으로 돌아가고,
책을 읽다가 집중이 흐트러지면 또다시 노트북을 연다.
그렇게 오전 시간은 조용히 흘러간다.
빼놓을 것도, 덧붙일 것도 없다.
점심 무렵이 되면
카페에서 빵 하나를 시켜 먹기도 하고,
미리 챙겨온 간식을 들고 공원으로 향하기도 한다.
나무 그늘 아래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바람이 시간을 대신 넘겨주고, 햇살은 조용히 어깨 위에 내려앉는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도시락 김의 짠맛을 씹으며
나는 사람들을 바라본다.
유모차를 밀고 가는 젊은 엄마,
휴대폰을 붙잡고 분주히 걷는 직장인,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학생.
그 흐르는 얼굴들 사이에서
나는 조용히 내 시간을 구경한다.
말없이 사람을 바라보는 일,
그것도 은퇴자의 특권일지 모른다.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 속에 들어앉은 기분으로,
점심 시간을 천천히, 그리고 충분히 만끽한다.
오후가 되면 다시 카페로 돌아간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논다.
누가 보면 그게 무의미한 반복이라 할지 모르지만
나에겐 하루의 리듬이고, 하나의 삶이다.
머물다 가는 문장들, 그 조용한 흐름 속에서
나는 가장 나다운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간단히 식사를 하고, 책을 읽거나 넷플릭스를 본다.
요란한 액션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조용히 따라가는 영화가 좋다.
보다가 멈추고, 다시 글을 쓰기도 한다.
하루를 정리하는 문장을 한두 줄 남기며,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한다.
“잘 살았어, 오늘도.”
하루에 한 시간쯤은 산책을 한다.
아침에 카페에 가기 전이거나, 저녁을 먹은 뒤가 많다.
산책길의 운동기구에 잠시 몸을 맡기고,
나무와 바람을 천천히 걷는다.
그 시간은 생각을 비우는 시간이라기보다는,
그저 아무 생각이 머물다 지나가게 두는 시간이다.
가끔 친구들이 묻는다.
“너, 심심하지 않냐?”
“하루 종일 뭐 하냐?”
그리고 덧붙인다.
“우린 아직 일해야지. 일 안 하면 바로 실직인데.”
그 말을 들을 때면 조용히 웃는다.
그들은 아직 은퇴가 아닌 ‘실직’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나는 안다.
소득이 끊기는 것, 사회에서 비켜나는 것.
그 두려움이 그들을 일터에 붙잡아 둔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이제는 두렵지 않다.
글을 쓰고, 책을 읽고, 하루를 내 마음대로 구성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유와 여유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몸과 마음으로 체득한 지 오래다.
친구들은 여전히
‘언젠가 은퇴할 날’을 말하지만
나는 이미 은퇴했고,
그 삶을 조용히 누리고 있다.
단조롭지만 깊이 있고,
느리지만 충만한 삶,
무언가를 이루는 삶이 아니라,
하루를 충실히 살아내는 삶이다.
글을 쓰며 창작의 희열을 느끼고,
책을 읽으며 지적 깨달음의 여운을 음미한다.
지금, 이 순간이, 내 인생 60년 중,
가장 조용하고도 재미있는 시간이다.
나는 오늘도 논다.
그리고 아주 잘 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