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 죽으면, 나도 따라가도 돼?”
어느 저녁, 승원이의 말에 우리는 잠시 말을 잃었다.
그 한 질문 속에는 사랑이, 두려움이, 그리고 유치하지만 너무도 깊은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아직 만 세 살. 세상을 다 알지 못하는 아이가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그 감정을 말로 꺼내 표현했다는 점이 더 깊숙이 마음을 건드렸다.
아내는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죽는 건 누군가를 따라가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을 오래오래 기억하는 거야. 지금은 엄마 아빠가 건강하고, 너랑 오래오래 같이 있고 싶어.”
그 순간, 나도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죽음을 어떻게 생각하지?’
나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물론 두렵지 않다고 말하는 건 솔직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죽음을 끝으로 여기진 않는다.
나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흐름이고, 정지가 아니라 순환이다.
나는 천국을 믿지 않는다.
신이 모든 것을 판단하고, 착한 사람은 천국에, 나쁜 사람은 지옥에 보내는 서사를 깊이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보다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상상하기보다는, 죽기 전까지의 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집중하고 싶다.
내가 믿는 죽음에 대한 철학은 불교와 가깝다.
불교가 말하는 무상(모든 것은 변한다), 연기(모든 것은 이어져 있다), 무아(고정된 나는 없다)라는 사상은 내가 살아가며 느껴온 세계의 느낌과 잘 닮아 있다.
세상은 끊임없이 변한다.
사람도, 관계도, 감정도. 그러니 그 안에서 억지로 붙잡고 있는 것이 오히려 고통이 된다.
그걸 놓아줄 수 있는 용기,
그리고 연결된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태도.
그게 불교가 말하는 지혜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조차,
어떤 단단한 실체가 아니라 경험과 기억과 감정이 잠시 모인 모래성 같은 것이다. 그걸 인정하게 되면, 나를 덜 미워하고 덜 집착하게 된다.
불교는 나에게 '구원'이 아니라 '이해'를 주었다. 신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스스로를 들여다보면 답이 있다는 위안.
그래서 나는 불교를 믿는다기보다, 불교적으로 살아가고 싶다는 말이 더 맞는지도 모른다.
이런 불교적 사유는, 내가 오래 좋아했던 또 다른 말, 카르페 디엠(Carpé Diem)과도 통한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내라는 말.
흔히 쾌락주의로 오해되지만, 사실은 무상한 삶 속에서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라는 철학이다.
불교가 말하는 무상도 같은 이야기를 한다.
“내일은 오지 않을 수도 있다. 지금 이 순간에 깨어 있으라.”
죽음을 믿음으로 해결하려 하지 않는 대신,
지금 이 순간 하나하나가 얼마나 귀한지를 깊이 깨달으며 살아가고 싶다.
승원이에게 하고 싶은 말
승원아, 죽음이 무서운 건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지기 때문이야.
하지만 꼭 기억해줘. 사랑은 몸이 사라져도, 마음으로 이어지는 거란다.
엄마도, 아빠도, 그리고 너도 언젠가는 사라지게 될 거야. 하지만 그게 당장도 아니고, 그게 끝도 아니란다.
우리가 함께 웃은 날들,
서로 손잡고 걷던 아파트 놀이터,
밤마다 이야기하던 작은 속삭임들.
그 모든 건 누가 가져가지 않아. 그건 네 마음 안에서 계속 살아 있을 거야.
죽음을 따라가지 말고, 그 사랑을 오래오래 간직해줘.
너도 언젠가, 누군가에게 따뜻한 기억을 남겨주는 사람이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아주 잘 살아낸 거야.
그리고, 지금의 나처럼 누군가에게 말할 수 있을 거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사랑이 흐르는 또 다른 방식이야.”라고.
죽음은 그렇게, 흐름 속에서 이어지는 마음의 전환점이란다.
사랑해, 승원아.
오늘도, 내일도, 우리가 함께 있는 이 순간이 가장 귀한 시간이라는 걸 잊지 않기를 바란다.
– 아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