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 위의 발자국

by 노경문

도쿄의 편의점에서 나는 뒷통수를 맞았다.
익숙한 포장지. 익숙한 색감.
내가 어릴 적부터 먹어온 과자들이 줄줄이 진열돼 있었다.

순간, 이게 수출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들은 일본 제품이었고,
오히려 우리가 그것들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었다.
익숙한 맛을 본 순간,
내가 자라며 즐겨 먹던 것들이 남의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부끄러움과 놀라움,
그리고 묘한 낯익음이 뒤섞여, 잠시 말문이 막혔다.

사실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 장면을 눈앞에서 마주하니,
내 안에 있던 ‘창작의 순수성’ 내지는 ‘자긍심’에 대한 환상이
조각처럼 부서지는 느낌이었다.
순간 깨달았다.
남의 것을 닮아가는 건 어쩌면, 우리가 성장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는 걸.

기술을 빌린다는 것,
혹은 ‘베낀다’는 건 늘 부정적인 말로 들린다.
그렇지만 돌이켜보면,
산업화의 초입에서 어느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지금의 미국과 중국의 무역전쟁도 그 시발점이 다르지 않다.
미국은 중국이 자국의 기술을 ‘훔쳤다’고 말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자연스럽게 따라잡는 과정’이었다.
그리고 그 '따라잡기'는 미국이 한 세기 전 유럽에게 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기술 탈취, 베끼기, 그리고 보호무역은
패권을 두고 벌이는 성장통의 반복된 패턴이었던 셈이다.

이런 생각을 할 때면, 내 머릿속에 하나의 질문이 맴돈다.
“지적재산권이 고도로 발달하면, 사회는 오히려 느려질 수 있는가?”

어쩌면 그렇다고 생각한다.
물론 저작권 침해를 방관하거나 정당한 권리마저 무시하자는 건 아니다.
다만 균형의 문제다.
보호만을 외치다 보면, 창작은 움츠러든다.

요즘은 AI 이미지 생성을 통해
지브리풍으로 사진을 바꿔보는 것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이다.
나도 내 사진을 변환해보았고, 결과물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게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원작자는 끝내 이 사회현상을 '역겹다'고까지 말했다.
그 말은 내 작업 전체를 모욕하는 말처럼 들렸다.
마치 죄를 지은 듯, 나는 한동안 스스로를 의심하게 됐다.

"내가 만든 건데, 왜?"
"그림체조차 모방이 안 되는 거라면, 사람은 대체 뭘 배울 수 있지?"

엄마에게도 이런 질문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때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에서 쓴 글씨체 때문에 고소당했어.”

그 말이 농담처럼 들렸지만, 사실이었다.
학교 홈페이지의 글씨체, 교실 벽에 붙인 교육용 이미지 때문에
교육청으로 내용증명이 날아왔고, 결국 합의금을 지불해야 했다.

선생님들이 악의적이었을까?
아니다. 단지 권리라는 개념조차 익숙하지 않았던 세대였을 뿐이다.
그걸 노리는 저작권 사냥꾼들이 있었다.
법과 무지의 그늘 속에서, 권리는 종종 무기가 되었다.

나는 믿는다.
‘다수의 공감을 위한 인용’은 결국 창작자의 이익과도 연결된다고.

사람들은 사랑하는 것을 공유하고, 퍼뜨리고, 자기도 흉내 내본다.
그건 욕심이 아니라, 존경이다.

그러니 때때로, 우리는 이 질문을 스스로 던져야 한다.
"내 권리를 지키는 것이 누군가의 창작을 꺾는 일은 아니었는가?"

또 반대로도 묻자.
"내 창작이 누군가의 것을 온전히 무시하고 만든 것이었는가?"

창작자의 고유한 노력은 마땅히 보호받아야 하기에, 지적재산권은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기준선이나 무기가 되어선 안 된다.
그것은 칼이 아니라, 지도이자 나침반이어야 한다.

우리가 어디까지 나아갈 수 있고,
또 어디부터는 남의 영역인지,
서로가, 모두가 함께 고민하고 합의하는 선이 되어야 한다.

함께 베끼며
함께 만들어
함께 성장해온 존재였으니까.

창작은 늘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남기는, 또 하나의 발자국일 뿐이다.
그리고 당신은, 어떤 발자국을 남기고 싶은가?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닻을 내릴 수 없는 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