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보다 감정이 앞서는 사회에 대한 고찰
“악법도 법이다.”
이 말은 법적 논쟁에서 종종 만병통치약처럼 등장한다.
어떤 이는 이 말을 방패 삼아 불편한 현실을 정당화하고,
또 다른 이는 그것을 억압의 상징으로 느낀다.
하지만 이 문장이 정말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나온 것인지, 그리고 오늘날에도 유효한 태도인지 되묻는 일은 많지 않다.
플라톤의 <크리톤>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억울한 사형 판결에 대해 탈옥을 권하는 친구에게 말한다.
"국가의 법을 어기는 것은, 그 국가와의 약속을 어기는 것과 같다."
여기서 파생된 해석이 바로 "악법도 법이다"라는 통념이다.
하지만 이 말은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명제가 아니라,
법의 정당성과 개인의 책임 사이의 긴장을 드러내는 질문이다.
한국에서 법은 내용보다 ‘적용 여부’와 ‘사회 분위기’에 따라 평가된다.
최근 테슬라 오너 커뮤니티에서 올라온 게시물 하나가 논쟁을 불렀다.
어떤 이는 충전구역에서 일정 시간 내 충전 없이 주차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설명했고,
다른 이는 그 태도가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반박했다.
또 다른 글에서는 틴팅 관련 경험담이 공유됐다.
“경찰이 신경도 안쓰고 그냥 보내주더라”는 사례,
“지금 한국 도로에 다니는 차 열 대 중 여덟은 불법”이라는 자조 섞인 댓글도 있었다.
이처럼 현실에서 조금이라도 어두운 틴팅은 법적으로는 위반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사실상 묵인된다.
반면, 전기차 충전구역은 법적으로 허용된 행위임에도 커뮤니티에서는 도덕적 비난의 대상이 된다.
“충전도 안 하면서 왜 거기 세워?”라는 정서가 지배적이다.
"합법이어도 하지 말아야 한다"는 도덕의 잣대가 점차 법 위에 군림하려 든다.
이 두 사례는 거꾸로 닮았다.
하나는 불법이지만 사회적으로 용인되고,
다른 하나는 합법이지만 도덕적 낙인이 찍힌다.
법보다 감정, 여론, 분위기가 앞서는 사회에서
우리는 과연 어떤 기준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입법은 정치의 산물이지만, 폐지는 이해관계의 덫이다.
단통법, 대형마트 의무휴업 및 새벽배송 금지, 의대증원 2000명.
이들 법안은 졸속입법 또는 정치적 계산의 산물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한 번 제정된 법은 좀처럼 폐기되거나 수정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입법은 정치다.
여당의 힘, 여론의 파도, 특정 집단의 목소리가 모이면 법은 만들어진다.
하지만 폐지는 다르다.
이미 형성된 이익집단을 건드려야 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
그 결과, 시민들은 불합리한 법 아래서 오랫동안 침묵하며 살아가야 한다.
마치 한번 내려진 명령은 되돌릴 수 없다는 듯이.
법이 도덕을 침범하고, 도덕이 법을 초월할 때,
시민은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현대는 절대적 선과 악이 사라진 시대다.
사람마다 다른 가치관, 다양한 삶의 방식, 복잡한 맥락이 공존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하나의 잣대를 정해 이를 법으로 강제한다.
이 강제력은 정당한가?
법은 본래 사회 질서를 위한 최소한의 장치였지만,
지금은 생활 방식, 소비 습관, 감정까지 규율하려 든다.
법이 도덕의 영역까지 침범하고, 도덕은 다시 법을 넘어서 사람을 단죄한다.
이처럼 규범이 중첩되면 시민은 법과 도덕 사이에서 끊임없이 자기 검열에 시달린다.
법은 그 자체로 정의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법은 시민의 저항을 받을 수 있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수정되어야 한다.
법이 무조건적으로 존중받기 위해선,
그 법이 현실과 양심의 언어로 설득력을 가져야 한다.
감정이 아닌 원칙이, 명분이 아닌 권리가 법을 움직인다.
한국과 달리,
독일과 미국은 법을 '도덕적 무기'로 삼지 않는다.
독일은 대륙법 계통의 국가지만, 시민의 권리를 논리와 체계 속에서 설계한다.
법은 정밀한 도구이며, 도덕과는 분리되어 있다.
법은 지켜야 할 시스템이고, 도덕은 개인이 스스로 판단할 몫이다.
예를 들어,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학생의 종교 복장 착용, 안락사 권리 등을 논리적 절차를 통해 판단한다.
그 과정에서 감정이 아닌 원칙이 앞선다.
미국은 판례 중심의 영미법 국가로, 시민 개개인이 법을 '내 권리를 지키는 도구'로 적극 활용한다.
대표적으로 2017년,
한 전기차 운전자가 충전구역에 불법주차된 내연기관 차량을 소송했고,
해당 지역에서는 이후 법칙금을 부과하는 ‘ICEing 금지법’이 제정되었다.(내연기관차(ICE)가 전기차 충전구역을 점유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법은 무서운 것이 아니라,
나를 지켜주는 방패이며, 부당한 권력에 맞서 싸울 무기다.
미국 시민은 필요하면 소송을 통해 해석을 요구하고 바꾸려 든다.
반면, 한국은 법이 감정과 도덕, 정치와 여론이 뒤섞인 혼합물처럼 작동한다.
불법이지만 묵인되는 관행이 있고,
합법이지만 도덕적 비난을 받는 행위가 있으며,
여론이 법보다 먼저 사람을 단죄하는 일이 흔하다.
감시의 법과 검열의 도덕, 우리는 이중 규범 속에 갇혀 있다.
전통적으로 한국 사회는 유교적 윤리와 국가주의적 통제의 이중 구조 속에서 발전해왔다.
조선 시대의 '예(禮)'는 법보다 우선했고,
근현대의 개발독재 시절엔 '국가의 명분'이 개인의 자유보다 앞섰다.
이 과정에서 법은 도덕을 대체하거나 흡수해버렸고,
시민들은 법 앞에 서면 두려움을 먼저 배우게 되었다.
그 결과,
법은 외부의 감시 도구로, 도덕은 내부의 검열 도구로 기능한다.
이중 규범 속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통제하고, 서로를 감시하며, 종종 불필요한 죄책감에 휘둘린다.
이제는 물어야 할 때다.
법은 정말 도덕의 대리인이어야 하는가?
우리는 언제부터 법을 감정의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는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정답이 아니라 질문이어야 한다.
그 법이 왜 악법이 되었는지, 그것이 왜 아직도 살아 있는지를 묻는 출발점이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법과 도덕, 그리고 관습이 충돌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셋 중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셋의 긴장을 어떻게 건강하게 조율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잣대에 침묵하며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잣대가 과연 정당한지 끊임없이 묻는 태도다.
법은 절대선이 아니다.
법은 시대의 거울이자, 우리가 만든 계약이다.
그리고 그 거울이 흐려졌다면, 다시 닦을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