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인 사유리 씨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특이한 여자인가보다 했다.
TV를 잘 보지도 않고, 연예인의 사생활에 관심도 없지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아들이 나의 아들 승원이와 동갑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가끔 그 아이를 검색해보곤 했다.
잘 자라고 있을까.
밝은 표정, 튼튼한 몸, 또래보다 빠른 말투 같은 걸 보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정말 이상했다.
나는 그녀를 잘 알지도, 응원하지도 않았는데도.
아마도
‘아이를 키우는 사람’이라는 공통된 감정대에서
나는 그녀를 이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요즘 여기저기서 비혼 출산 이야기를 자주 본다.
덴마크에 가서 정자를 기증받고, 브로커를 통해 출산한 여성들.
그리고 그 아래엔 어김없이 따라붙는 질문들이 있다.
“아이의 입장은 생각해봤냐?”
맞다.
그 말은 정당하다.
아이를 세상에 데려오는 것은, 그 어떤 일보다 무거운 결정이다.
그래서 나 역시 그 질문 앞에 멈칫했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나였어도 괜찮았을까?'
하지만 그 순간,
유퀴즈에 나왔던 57세 선박 전기수리공의 말을 떠올렸다.
“나는 가난했던 부모를 원망하지 않는다.
그게 부모의 잘못은 아니니까.
어차피 살아야 하니까.”
그는 중학교밖에 못 나와서,
열일곱에 부산으로, 스물하나에 배를 타고
파도와 멀미에 쓸개물도, 눈물도 쏟아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그 세상에 데려온 부모를 탓하지 않았다.
그는 살아냈다는 것으로 삶을 증명했다.
그 말이 내 마음속 무언가를 흔들었다.
그 어떤 이론보다도, 감정보다도,
그 말 안에는 삶의 진짜 정직함이 있었으니까.
한국은 이제 출산율 0.7의 나라다.
해마다 십수조(2025년 : 19조 7000억)원을 쏟아붓는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많고 복잡한 정책들.
그런데 결과는 늘 더 나빠진다.
왜?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사람을 낳는 일’을
정책으로 설득하고, 돈으로 유도하려 한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다는 건,
‘의무감’이나 ‘국가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 출산은
자기 안의 깊은 결핍을 꺼내어 마주하는 일이고,
어떤 사람에겐 사랑의 연장선이고,
어떤 사람에겐 오직 삶 그 자체다.
비혼 출산이 늘고 있다.
2023년 한국의 비혼 출산 비율은 4.7%.
프랑스는 무려 65%에 달한다.
그런데 한국은 아직도 출생신고조차
결혼한 부부가 아니라면 제대로 할 수 없다.
현행 가족관계등록법상, 혼인 외 출생의 경우 친모만 단독으로 출생신고가 가능하다.
사실혼 관계에서 태어난 아이는, 친부가 출산휴가나 육아휴직을 받기 위해선 ‘사실혼 입증서류’를 따로 제출해야 한다.
말하자면, 아버지로 존재해도 법적으로는 반쯤 '외부인'인 셈이다.
심지어 국내 정자은행도 '기혼 부부'에게만 이용 자격이 있다.
법은 현실보다 너무 늦고,
그 틈에서 아이가, 그리고 부모가
법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조용히 배제당한다.
출산은 결혼한 사람만의 권리가 아니다.
결혼과 출산은 같은 선에 있지 않다.
형식보다 진심이 중요하다.
아빠 없이 자라는 아이는 불행할까?
그렇지 않다.
엄마 없이 자라는 아이도 불행해야만 한다는 전제 역시 틀렸다.
돌봄은 성별의 문제가 아니라, 책임의 문제다.
그리고
정자은행의 경우,
엄마가 준비되어 있다면,
그 선택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단, 출산이 누군가의 공허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 변질되어선 안 된다.
한 생명 앞에 서는 일은, 늘 조심스럽고 정직해야 하니까.
나는 출산을 장려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 나라는 아직도 ‘어떤 가족은 정상이고, 어떤 가족은 예외’라고 말한다.
그 틀 안에서만 지원하고, 그 틀 밖은 회피하거나 외면한다.
그러면서도 말한다.
“아이를 낳아달라”고.
나는 승원이를 낳을 때,
무수한 생각과 두려움 속에서
그래도 ‘해볼 수 있다’는 믿음 하나로 시작했다.
그래서 알고 있다.
이 선택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 어떤 형식이든
그 진심 하나로 생명을 마주한다면
나는 그를 응원하고 싶다.
아이의 입장도 중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아이든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믿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이자,
진짜 저출산 정책의 출발점이다.
오늘은
그런 순간이 조금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내가 낳든, 남이 낳든
그 아이가 '설명되어야만 이해받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