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이 끝난 자리에 남은 정의

주호민 사건에 대한 기록

by 노경문

2024년, 만화가 주호민 씨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있었던 학대 의혹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다.

이 사건은 단순히 한 교사의 유무죄를 넘어서, 우리가 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정의를 어디서 찾을 것인지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졌다.

최근 항소심에서 해당 특수교사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

법원의 판단 근거는 명확하다.

아이의 옷에 몰래 넣은 녹음기는 통신비밀보호법 위반으로 간주되었고, 그에 따라 해당 녹취는 증거로 인정받지 못했다.


형식상으로는 법이 '정확하게' 작동했다.

그러나 그 정확함이 누구를 보호했고, 누구를 남겼는지는 따져볼 문제다.

피해 아동은 자폐성 장애를 가진 미성년자다.

의사소통이 어렵고, 자신의 피해를 명확히 전달하기 힘들다.

그래서 부모가 자녀를 대신해 교사와의 대화를 녹음했다.

그러나 법은 이를 "당사자의 동의 없는 제3자의 도청"으로 판단했고,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여기서 의문이 든다.

만약 그 아이가 비장애인이었다면, 대화의 당사자로서 법적으로 녹음의 주체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의사 표현이 가능한 아동이었다면 이 녹음은 합법적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아이가 말을 할 수 없기에 그를 위한 녹음이 불법이 되는 아이러니,


이것이 우리 법의 현실이다.

이 사건의 판단은 형법적 해석을 넘어, 사회적 여론과 교사 집단에 대한 고려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죄 판결 이후 다수는 "주호민이 과도했다"는 여론에 공감했고, 이는 초기의 도덕적 분노와는 사뭇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판결이 여론을 반영했는지는 단언할 수 없지만, 이 판단이 특수교사라는 필수직업군의 구조적 부담을 감안한 결과로 읽힐 여지도 있다.

이러한 흐름은 과거 이대목동병원 신생아 사망 사건과도 닮아 있다.

당시 의료진은 구속되었지만 최종적으로 무죄를 받았다.


법은 형사책임을 묻지 않았고,

남은 건 "이대로 괜찮은가"라는 사회적 씁쓸함이었다.

특히 1심의 구속은 의료계에 구조적 공포를 안겼고, 필수의료 인력 부족 심화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법은 절차적 정의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 정당성 역시 조문 해석에 따라 달라지며,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결론은 크게 바뀐다.

결국 법적 해석이라 해도

윤리, 여론, 판결 이후의 파급력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고 보긴 어렵다.


이는 법이 가진 구조적 모순이며, 우리는 그 갈림길에서 종종 판사의 재량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게 된다.

나아가, 사법부의 판단이

여론이나 정치적 부담에 따라 기울어진다면 이는 해석의 다양성을 넘어 법의 정치화이자 무기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그 경계에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

법의 중립성은 판사의 의지만으로 유지되지 않는다.


정권의 방향,

언론의 보도,

대중의 압력,

직역 집단의 조직력.


이 모든 것들이 모여 판결을 둘러싼 보이지 않는 울타리를 구성한다.


그 순간 법은 중립적 규범이 아닌, 특정한 현실을 정당화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사법의 자율성이 정치의 연장선으로 보일 때,

법은 제도라는 옷을 입은 또 다른 권력이 된다.

그러나 이쯤에서 질문은 더 깊어진다.


만약 법이 이처럼 해석의 다양성과 형식의 딜레마로 가득 찬 체계라면,

정말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는

법이 개입하지 않아도 질서가 유지되는 상태 아닐까?


‘법 없이도 사는 사회’란,

결국 서로가 서로를 조율하고 존중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일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다.

사람들은 점점 스스로 판단하려 하지 않고, 틀 안에서 수동적으로 조정받기를 원한다.


법과 제도가 정해주는 ‘정답’에 기대고, 그 안에서 감정적으로 연대하려 한다. 판단의 피로가 만든 결과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시민적 사유 대신, 대중적 동조가 앞선다.

공감은 구조로 흡수되고, 정의는 여론의 모양을 따른다.

해시태그가 윤리를 대체하고, 분노는 여과 없이 확산된다.

틀 속의 연대는 편하지만, 틀 밖의 책임은 불편하다.


그러나 진짜 성숙한 시민의 태도는 이 불편함을 감내하려는 데서 시작된다.

규범 없는 자유가 아니라, 규제 이전의 윤리를 갖는 것.

다수의 분노에 휩쓸리기보다, 맥락을 먼저 읽고 말하는 용기.

그리고 법정이 아닌 일상에서, 공감과 회복의 실천을 감당할 수 있는 힘.

그것이야말로 법 없이도 법보다 더 단단한 삶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길이다.

법이 윤리와 도덕의 울타리 없이 작동할 때, 판결은 종종 찝찝하게 남는다.

잘못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해서 피해가 없던 것은 아니다. 죄가 없다고 해서 고통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이번 사건의 핵심은

교사가 실제로 학대를 했느냐가 아니라, 이 사회가 말할 수 없는 존재를 어떻게 보호하느냐다.

법이 가장 말 없는 존재를 보호하지 못할 때, 정의는 멀어진다.

사건은 끝났지만 질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누가 증언할 수 없는 존재의 고통을 대신 말할 수 있는가.


그들의 목소리가 사라진 재판정에서

우리는 무엇을 정의라 부를 수 있는가.

이제는 판결이 끝난 뒤, 시민의 언어로 다시 정의를 세워야 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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