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이재명. 그들을 바라보며, 나를 돌아보다

by 노경문

도널드 트럼프와 이재명.


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이자 자본주의의 화신,

또 한 사람은 한국의 유력 대통령 후보, 진보 정치인이자 자수성가형 행정가다.


이념적으로는 정반대에 가까운 두 인물이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정치적 행보와 지지자들의 열광은 닮은 점이 많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오히려 각 나라 국민이 정치에 기대는 감정적 방식,

다시 말해 "포퓰리즘의 민낯"을 드러낸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 엘리트를 향해 '기득권의 고리를 끊자'고 외쳤다.

기존 질서에 대한 분노, 잊힌 미국인의 감정, 무역과 이민으로 삶이 흔들렸다고 느낀 중하층 백인 남성들의 지지는 강력한 정치적 파동을 일으켰다.


그는 무례하고 거칠었지만,

정제된 정치 언어에 식상한 이들은 그의 "진짜 말투"에 환호했다.

핵심은 이념이 아닌 감정이었다. "그는 우리 편이다"라는 확신이 있었다.

이재명도 엘리트를 공격한다.

검찰, 언론, 기득권 정치인을 향해 "기득권 카르텔"이라 지칭하며 전투적인 태세를 갖춘다.


그의 삶 자체가 서민적 서사다.

공장에서 일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에 진학한 그는 "우리의 억울함을 아는 사람"이라는 감정적 정당성을 형성했다.

거친 언행은 오히려 현실 정치인의 모습이라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두 사람은 정치를 이념보다 감정으로 설계한다.

정당보다는 인물, 논리보다 서사, 정책보다 적대 구도가 강조된다.

포퓰리즘은 그렇게 작동한다.

그러나 그 작동 방식은 비슷해 보여도, 뿌리는 다르며 이는 국민성에서 비롯된다.

미국인은 개인주의와 자유의 전통이 깊다.

트럼프를 지지한 이들은 정부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다는 불만보다, 지나친 개입에 대한 반감이 크다.

"우리를 잊었다"는 감정은,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어온 사람들이 느끼는 자존심의 상처다.


트럼프는 그 자존심을 회복시켜주겠다고 말했다.

그 메시지는 특정 집단의 감정선을 정조준했다.

한국은 공동체 중심의 문화다.

한국인은 국가와의 정서적 관계를 중시한다.

정부가 나를 배려하지 않고, 정의롭게 대우하지 않는다는 감정은 억울함을 불러온다.


이재명의 포퓰리즘은 정의, 공정, 연민에 기반한다.

이는 공동체 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이들에게 깊이 닿는다.

그렇다면 나는 왜 트럼프에게 끌리고, 이재명에게는 거리감을 느끼는가?

나는 엘리트주의를 경계하면서도, 자유와 책임을 중시하는 성향이다.


누군가의 억울함에 공감은 하지만,

그 억울함을 구조 탓으로 돌리고 그 책임을 사회 전체에 요구하는 방식에는 의문이 든다.


트럼프는 싸우는 자아를 드러낸다.

그는 '내가 나를 구한다'는 메시지를 품고 있다.

반면 이재명은 '우리가 함께 억울하다'고 말한다.


나는 전자에 더 끌린다.

능동적 감정에는 호감을, 수동적 감정에는 피로감을 느낀다.


트럼프의 분노는 공격적이며, 책임을 묻고 스스로 쟁취하려는 태도를 지녔다.

반면 이재명의 감정은 연민에 가깝고 방어적이다.

억울함은 타당하지만, 거기에 머무는 리더는 불안하다.

예를 들어,

트럼프가 단상에서 "우리는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고 외칠 때, 나는 그 자신감 속에서 에너지와 추진력을 느낀다.

실패했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그의 메시지는 내 안의 투쟁 본능을 자극한다.

나 역시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며 홀로 책임지고 일어섰고,

그때마다 필요한 건 누군가의 공감이 아니라 나 자신을 일으키는 결단이었다.

그런 경험 위에서 트럼프의 서사는 단순한 선동이 아니라 내 삶의 방식과 겹친다.

반면 이재명이

"나는 억울하다, 그리고 여러분도 억울하다"고 말할 때,

나는 일시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이내 묻게 된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답이 없거나 허망할 때, 감정의 수렁에 빠진 듯한 기분이 든다.

나의 삶은 억울함을 에너지로 바꾸려는 시도였기에, 거기에 머무는 리더는 위로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온다.

때로는 나의 분투가 지워지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요즘은, 한때 절대 불가하다고 여겼던 이재명조차 나쁘지 않게 느껴질 때가 있다.


좌와 우의 경계는 희미해졌고,

정치란 본질적으로 WWE 프로레슬링처럼 각본이 있는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인은 배우고, 우리는 관객이다.


각본은 존재하며, 그것은 결국 대중이 원하는 방향으로 쓰인다.

선거철의 자극적인 워딩이나 진영 논리는 대부분 연출이다.

그 쇼에 과몰입할 필요는 점점 사라진다.

돌이켜보면 진보 쪽 정권 시절, 내 삶이 더 안정적이었던 순간도 있었다.


체감되는 불안은 적었고,

세금과 기회는 오히려 느슨한 느낌이어서 좋았다.

급변하는 규제와 분위기 속에서 기회가 보이기도 했다.

그게 공정하거나 실제로 공정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결국 판단의 기준이 달라졌다.


'내가 옳다'는 주장을 고수하기보다, 지금 이 상황이 곧 현실이며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는 체념이라기보다, 시대와 정서를 수용하는 방식에 가깝다.

포퓰리즘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대중의 정서와 욕망을 가장 직관적으로 반영하는 정치의 언어다.


어떤 포퓰리즘이 더 편안하거나 불편하게 느껴지는가는,

결국 당신이 세상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는지,

어떤 가치 위에 서 있는지를 보여주는 리트머스 시험지일 수 있다.

트럼프와 이재명은 다르면서도 닮았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감정은,

사실 당신 자신을 가장 선명하게 비추는 거울이다.

어느 쪽이든 현명한 선택이 되기를 바란다.


다만 정치가 지나치게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기를,

극단의 언어와 태도가 일상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

균형과 성찰이 살아 있는 정치, 그리고 그 정치를 바라보는 시민의 시선이 남아 있기를 희망한다.

정치는 결국, 한 시대를 통과하는 공동의 상상이다.

누구나 각자의 자리에서 잠시 바라보다가 지나가는 광경일지도 모른다.

그 광경 속에서 내가 어떤 자리에 서 있었는지를,

언젠가 조용히 되돌아보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모든 과정을 통과하며,

한때는 분노했고,

한때는 냉소했고,

지금은 조금 멀찍이 바라본다.


그게 무력함일지, 여유일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이 연극이 끝난 뒤에도

그 무대에 속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월,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