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해 목소리가 컸었다.
누가 옳고 그른지, 이 나라를 망치고 살릴 사람인지,
머릿속엔 선이 명확했고 마음에도 불이 붙어 있었다.
가족들 앞에서도, 친구들 사이에서도
내가 옳다는 확신으로 말하곤 했다.
부끄럽지 않았고, 오히려 정의감이라 믿었다.
그땐 목소리를 낼수록 살아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말이 닿든 아니든 상관없었다.
나를 정의하는 건, 내가 뱉는 말의 크기와 세기였다.
그러다 어느 날, 그 열정은 '쨍그랑' 하고 깨졌다. 믿음은 흩어졌고, 말은 피곤해졌다. 확신은 지혜가 아니었다. 그저 에너지 소모였다.
남은 건 허무와 허탈감.
식어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무언가를 믿지 못하게 된 상태가, 누구보다 믿는 가족들에게도 미안하게 느껴졌다.
그들은 그 확신과 열정을 참아줬고, 때로는 공감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건 내가 옳아서가 아니라 아껴서였던 것 같다.
얼마 전, 이재용을 다룬 글을 써서 아버지께 보내드렸다.
판단을 구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고 그저 읽어주셨으면 했다.
돌아온 답장은 간결했고, 따뜻했다.
“작은 하나의 사건으로 출발하는 글쓰기는 창의력과 사고력,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내 아들 경문이가 자랑스럽다. 사랑한다.”
감사하다는 말과 함께, 조심스럽게 글의 내용에 대한 생각도 여쭈었다.
그러자 이렇게 답하셨다.
“생각은 같을 수도 있고 다를 수도 있다고 봄. 중요한 건 경문이가 작은 일을 통해 더 거시적인 방향으로 생각의 깊이를 넓힐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아빠는 경문이 생각에 전적으로 공감함.”
울컥했다.
아버지는 맞다거나 틀리다고 말하지 않으셨다.
대신 생각하는 태도를 믿어주셨다.
그건 오랜 시간 받아온, 익숙하고도 따듯한 방식이었다.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맹목적으로 동의하지 않고,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존중해주는 사람.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라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 여전히 미성숙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의견에 동의받고 싶고, 그 동조가 즐겁다.
반대로 누군가 반대하면, 감정부터 날카로워진다. 아직도 자라야 할 부분이라는 걸 매일 느낀다.
그래서 요즘 들어,
점점 더 아버지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날을 세우기보다,
길을 찾는 말을 하고 싶다.
지금은 누구의 편도 아니다.
누군가를 미워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특정한 입장에 기대고 싶은 마음도 없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남과 여.
수많은 편 가르기 속에서, 그저 조용히, 질문을 간직한 채 서 있고 싶다.
말의 의미보다,
말의 태도가 더 중요하다는 걸, 조금은 알 것 같다.
표현의 자유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는 게 아니라, 서로 다른 말이 존재할 수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다.
지금도 말하고 싶다.
다만 이제는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생각을 듣기 위해서.
아버지에게 받은 방식으로, 말하고 싶다.
아빠,
문득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당신처럼 나를 대해주는 사람이었다면, 누군가는 덜 외롭지 않았을까.
누군가는 말투에 상처받지 않고, 완강함에 긴장하지 않았을 텐데.
아직도 많이 부족해요. 동의를 받으면 기쁘고, 반대에는 마음이 꽁하게 굳어요.
아빠처럼 묵직하게 웃고 넘기지 못하고, 한참을 곱씹고 말해요.
그럼에도.. 요즘 들어 아버지 생각이 궁금합니다.
이제는 이기고 싶어서 말하지 않으려 해요. 이해받고 싶다는 욕심보다, 누군가를 이해해보고 싶어요.
어쩌면 언젠가는, 누군가에게 그런 따듯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요? 당신이 그랬던 것처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