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로운 개인의 시대는 저문다

by 노경문

최근 한 유명인의 과거사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며 벌어진 소동은 단순한 연예계의 가십으로 보기 어렵다.
그가 저지른 잘못은 분명하다. 그 잘못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사람들 역시 존재한다. 이 사실을 지우려는 시도는 어떤 방식으로든 옳지 않다.

그럼에도, 이미 처벌을 마친 개인에게 수십 년 전의 과오를 현재의 존재 전체와 동일시하며 사회적 생존권까지 지워버리려는 감정의 파도는 다른 문제다.
이 현상은 우리 사회가 ‘근대적 이성’에서 ‘전근대적 정서’로 되돌아가고 있다는 징후처럼 보인다.

나는 그 인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성향과도 거리가 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사태를 특정 인물의 무게가 아닌 한국 사회의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구조적 반응으로 냉정하게 바라볼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무결점의 인간’을 요구한다. 조선 성리학의 도덕적 엄숙주의, 그리고 서로의 사상을 끊임없이 검증해야 했던 근현대사의 상흔이 뒤섞이면서 생겨난 집단적 강박이다.
‘우리는 하나다’라는 문장 뒤에 숨어 있는 배척의 본능은, 조금이라도 기준에서 벗어나는 사람을 ‘비국민’으로 규정하는 오래된 습관으로 되살아난다.

이 과정은 섬뜩할 만큼 20세기 전체주의가 작동하던 방식과 닮아 있다. 인간을 한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집단의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한 ‘오염된 무언가’로 축소하는 과정.
떠도는 댓글창의 “쓰레기”, “사회악” 같은 표현들은 잘못을 비판하는 수준을 넘어, 인간을 객체로 지우는 비인격화의 전형이다.

물론 대중이 법보다 광장의 목소리에 기대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해외의 트럼프 같은 포퓰리스트든, 이 땅의 민주화 엘리트든, 모두가 법을 공정한 도구가 아닌 ‘내 편을 위한 무기’로 활용해왔다.
위에서는 법이 사유화되고, 아래에서는 분노가 법을 대체하는 순간, 법치라는 둑은 위아래에서 동시에 붕괴한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감정의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는 언제나 차갑고 효율적인 새로운 권력이 등장한다.
지금은 기업 국가가 그 자리를 준비하고 있다. 초국가적 플랫폼들은 약관을 헌법 위에, 알고리즘을 재판관 위에 두기 시작했다.

히틀러가 관료제를 활용해 학살을 ‘절차’로 만들었듯, 기업 국가는 개인의 삭제를 ‘데이터 처리’로 만든다.
매출에 도움 되면 과거의 잘못조차도 유연하게 재평가하고, 반대로 리스크가 된다면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조차도 순식간에 지울 것이다.
달러의 깃발 아래 진행되는 통제는, 붉은 깃발 아래서 이루어지는 통제와 다를 게 없다.

자유로운 개인이라는 개념은 어쩌면 인류 역사에서 짧게 반짝였던 예외였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지금 과거의 집단적 광기와 미래의 차가운 알고리즘 사이에서 양쪽으로 눌리고 있다.

그럼에도, 모든 사람이 감정에 취해 돌을 던지거나 편리한 사육을 선택할 때,
어딘가에는 여전히 “정말 이것이 옳은가?”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이 미워도, 그가 한때 잘못을 저질렀어도, 시스템 밖에서 부당하게 지워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이 조용한 질문 하나가, 짓눌린 공기 속에서도 끝내 사라지지 않는 작은 숨결이 되어, 우리가 아직 완전히 침묵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된다.

수, 금,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