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돌아가던 시계를 부수는 나라

by 노경문

최근 부산에서, 병원들이 전화로 응급 진료를 거부한 끝에 한 초등학생이 1시간 넘게 응급실에 도착하지 못한 채 숨진 사건은 한국 사회가 어디서 멈춰 서 있는지를 묻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는 몇 년 전부터 의사 수 부족이라는 익숙한 진단을 내놓았지만, 이는 표면에 불과하다. 예약 없이 당일에 상급종합병원 교수의 진료가 가능한 나라에서 ‘총량 부족’을 말하는 것은 구조를 가리기 위한 설명에 가깝다.


문제는 숫자가 아니라 배치와 이탈이다.


의사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사투를 벌여야 할 응급실의 숙련의들이 소송 걱정 없는 피부미용 레이저실로 밀려난 ‘기능적 증발’이 본질이다.

응급실 앞에서 전문의가 사라진 이유는 개인의 비도덕성이 아니다. 선의의 의료 행위조차 형사 처벌로 되돌아오는 사법 리스크가 누적된 결과다. 최선을 다해도 감옥에 갈 수 있는 환경에서, 위험을 감수할 유인은 사라진다. 많은 의사들이 필수의료를 떠나 상대적으로 안전한 비급여 시장으로 이동한 것은 제도가 만든 합리적 선택이었다.


공공의료 역시 이 구조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지방의료원 시스템의 붕괴는 흔히 말하는 재정 부족이 아니라, 국가가 운영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에게 사법 리스크와 저수가라는 핵심 문제를 끝내 해결하지 못한 구조적 실패를 보여준다. 그럼에도 싱가포르식 국가 주도 모델이 대안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싱가포르 모델의 핵심인 개인의 무거운 책임과 보상은 외면한 채, 오직 국가의 통제라는 행정적 편의성만 취사선택하려는 발상은 위험하다. 그 실체는 국가가 감당하지 못한 책임을 민간에 이전하는 방식일 뿐이다. 수가 제도로 이미 강력한 통제를 해온 정부가 이제는 민간 병원의 인력과 운영 자율성까지 흡수하려 하고 있다.


더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왜 잘 돌아가던 시계를 부수려 하는가.


한국 의료 시스템은 낮은 비용으로 높은 접근성과 질을 동시에 달성한 드문 성공 사례였다. 문제가 있다면, 시계를 멈추게 한 것은 과도한 사법 리스크라는 하나의 마모된 톱니바퀴였다. 수리하면 될 일을 정부는 시계 전체를 해체하고, 국가라는 크고 둔중한 모터를 강제로 달려한다. 이는 개혁이 아니라 구조 파괴다.


이러한 국가주의적 접근은 의료에만 머물지 않는다.


부동산, 교육, 금융, 법률 시장까지 사회 전반에 ‘공공성’이라는 이름의 통제가 확산되고 있다. 시장의 결함을 고치기보다 정부가 직접 가격을 정하고, 진입 장벽을 설계하며, 탈출구를 규제로 봉쇄한다.


이는 과거 관치 경제의 유령이 새로운 언어를 입고 되살아난 모습이다. 공공성은 필요하다. 그러나 공공성은 국가가 모든 결정을 대신할 권리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 책임을 지겠다는 의무에서 출발한다. 자율과 창의 대신, 국가의 명령이 모든 시스템의 최상단에 놓이기 시작했다.


이 흐름이 지속된다면 미래는 예측 가능하다. 예외는 없다.


겉으로는 안정된 저성장, 고복지 국가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혁신이 멈추고, 고부가가치 전문직 인력은 규제가 덜한 해외로 빠져나간다.


도전적인 인재들이 의학적 성취 대신 안정적인 관료가 되길 꿈꾸는 사회에서, 세계를 선도하던 한국 의료의 정교함은 과거의 전설로만 남게 될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효율은 누적되고, 우리는 중남미식 포퓰리즘의 피로 혹은 유럽식 공공의료의 만성적 대기를 ‘사회적 합의’라는 말로 정당화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모두가 평등하게 질 낮은 서비스를 받는 사회, 쇠퇴를 안정으로 착각하는 사회다.


대안은 국가의 강제가 아니다. 정교한 교환에 기반한 사회적 합의다.


필수의료를 담당하는 의사들에게는 파격적인 사법 리스크 면책을 제공하되, 그 대가로 전문성과 윤리에 대한 진입 장벽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의료계 내부에 강력한 자율 징계와 자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국가는 그 전문 집단의 판단을 검증하고 신뢰하는 구조다. 국과는 보호하고, 전문가는 자정 하며, 국민은 신뢰하는 삼각 구도가 작동할 때 시스템은 살아 움직인다. 이 균형이 무너지고 국가의 강제력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순간, 시스템은 겉보기만 유지된 채 내부에서 죽어간다.


국가 만능주의의 파도가 거세지는 시대에 개인이 취할 태도는 분명하다. 시스템이 나를 지켜줄 것이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국가가 약속하는 안온함 뒤에 숨어 있는 비효율과 관료주의를 직시해야 한다. 시스템이 경직될수록 개인은 글로벌 기준의 전문성을 갖추고, 언제든 이탈할 수 있는 실력을 확보해야만 자유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분명히 말해야 한다.

잘 돌아가던 시계를 부수는 순간, 국가는 우리를 보호하는 손이 아니라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힘이 된다는 것을.

수, 금, 일 연재